도로를 광장으로, 밀라노 피아체 아페르테 (2/2편)

by 서선영
주차장의 변신, 데르가노 광장


2018년 밀라노시에서는 2개의 시범사업이 더 추진되었었다. 그 가운데 ‘데르가노 광장’ 사업은 피아체 아페르테를 대표하는 표준모델로 자리잡은 사업이다. 밀라노시 제9구에 위치한 데르가노 광장(Piazza Dergano)은 ‘데르가노(Dergano)’라는 동네의 중심부에 위치한 광장이다. 입지상으로 주민들의 사회문화적 거점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자동차 30대를 주차하는 야외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와 자치구는 이 공간을 2018년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간 이 공간을 임시 보행광장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지역 주민 및 상인들을 설득했다. 기존 주차장을 이용하던 주민들에게는 인근에 다른 주차공간을 마련해주었는데, 대상지 주변 도로의 평행주차장을 사선주차장으로 조정하면서 확보할 수 있었다. 이때, 사선주차장을 교대 배치하며 시케인 도로선형을 구현함으로써 주차공간 확보와 함께 교통정온화도 꾀했다. 한편 차량 이용 고객이 줄어들 것을 우려하는 광장 주변 상인들에게는 보행광장에 노천 테라스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해주며 설득했다.


임시적 공간의 조성은 ‘리테이크 밀라노(Retake Milano)’라는 시민단체와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리테이크 밀라노는 2006년 만들어진 친환경 자원봉사 단체로 밀라노의 깨끗하고 살기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하여 공공공간의 환경 개선, 청소, 유지보수 등의 활동을 한다. 이들은 데르가노 광장의 아스팔트 위에 노랗고 하얀 원형의 패턴을 그려나갔다. 경쾌하게 바뀐 노면 위에 16개의 벤치와 2개의 탁구대, 45개의 화분, 공공자전거 대여소, 자전거 주차장이 놓여지면서, 오랜시간 자동차 주차장이었던 데르가노 광장은 보행광장으로 탈바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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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광장을 즐기는 시민들 ⓒ Roma fa schifo, 임시 조성 현장 ⓒGerace/LaPresse


설문조사 결과, 86%가 보행광장으로 전환된 것에 만족했고, 72%는 예전에 비해 데르가노 광장을 더 많이 이용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84%는 영구적인 보행광장으로 만들어지기를 바랬다. 시는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영구적인 광장 조성 합의 및 절차에 들어갔고, 데르가노 광장은 착공 전까지 임시 보행광장 상태를 유지하면서 시민들의 일상생활 장소로 기능했다.


그리고 2022년 임시가 아닌 진짜 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 조성된 광장은 걷거나 머무르기에 좋은 블록으로 바닥이 포장되었고, 나무와 녹지대가 풍성하게 조성되었다. 주변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는 재료와 컬러의 벤치, 가로등, 자전거 주차장 시설 등이 통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제 데르가노 광장은 더이상 단 자동차를 소유한 30명만 이용하던 주차장이 아니다. 데르가노 동네 주민 누구나 이용하는 제2의 거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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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르가노 광장 사업 전후 ⓒ Matty Edwards and Alessio Perrone, 영구적인 보행광장 조성 모습 ⓒ 밀라노시청


데르가노 광장의 성공은 이후 ‘피아차 아페르테’의 확산에 기폭제가 되었다. 저렴한 페인트와 가구만으로 빠르게 만들어진 보행광장의 모습은 피아체 아페르테의 표준모델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변화에 대한 저항과 우려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어차피 큰 돈이 드는 공사는 아니니까, 잠깐 바꿔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실험정신을 싹틔우게 했다.



지역주민들이 만들고 가꾸어 나가는 공공공간, 바코네 광장


밀라노시는 2018년 데르가노 광장의 성공을 기반으로 2019년에는 시범사업을 13개로 확대 추진했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동네에 열린 광장을” 이라는 제목의 시민 공모전을 개최하여 보다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피아체 아페르테’ 프로그램은 주민과 지방 정부의 효과적인 협력을 목표로 한다. 시범사업 추진에 있어서도 무엇보다 지역주민들의 합의와 참여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시민 공모전을 통해 대상지를 선정하고, 선정된 지역의 주민들과 ‘협업 협정(Collaboration Agreement)’을 맺어 주민들이 직접 보행광장을 임시 조성하고, 이후 유지관리까지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2019년 개최한 공모전에는 약 200개 이상의 시민단체와 800명의 시민들, 민간 기업, 학교, BID 단체 등이 총 65건의 제안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 22개의 제안서 선정되어 2020년부터 2021년까지 2년에 걸쳐 추진되었다. 대표적인 프로젝트로 ‘바코네 광장(Piazzale Bacone)’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image.png 바코네 광장 현황 및 계획 ⓒ 밀라노시청


바코네 광장은 건축물로 둘러싸인 일반적인 광장(Piazza)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교차로, 개방된 공간에 가까운 광장형 공간(Piazzale)의 형태를 갖고 있다. 교차로 코너의 각이 넓어 애매한 공간들이 많았고, 이 공간에 자동차들이 무질서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인근 초등학교 아이들의 주된 통학로였지만 좁은 보도, 지나치게 긴 횡단보도 등 아이들에게는 위험한 도로 환경이었다. 충분히 아이들이나 학부모들이 교류하기에는 좋은 위치였지만 그러기에는 쾌적하지 않고 안전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또한, 아스팔트로 뒤덮힌 면적이 높고 그늘이나 녹지가 거의 없어, 여름철이면 지표면 온도가 급상승하는 도시 열섬 현상이 심한 지역이기도 했다.


학부모와 지역주민, 상인들이 모인 단체 “APS l Baconiani”는 보행안전, 사회적 교류, 도시환경 등 복합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갖고 있던 바코네 광장이 아이들을 위한 광장으로 재탄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였고, “학교 앞을 아이들에게 돌려주자”는 슬로건으로 ‘피아체 아페르테 공모전’에서 선정되게 되었다. 바코네 광장 일대는 학교앞 거리라는 명분도 강력했지만, 기존 차도 폭이 과도하게 넓어 차선을 일부 줄여도 교통 흐름에 큰 지장이 없어서 도로다이어트 모델로서 가능성이 인정되어 선정되었다.


바코네 광장의 변화는 밀라노시, 전문가, 시민들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시와 전문가들은 차선을 줄이거나 교차로 코너의 내민보도를 조성하여 새로운 보행자 공간을 창출하는 도로 디자인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 밑그림 위에 “APS l Baconiani” 를 중심으로 학생, 학부모, 지역 주민들이 모여 직접 페인트칠을 해 나갔다. 그리고 그 위에 14개의 벤치, 3개의 피크닉 테이블, 24개의 화분, 탁구대, 자전거 주차시설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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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광장으로 조성된 바코네 광장 ⓒ Bloomberg Associates, 사업 전후 ⓒ 밀라노시청


이제 학생과 학부모, 지역주민들은 바코네 광장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아이의 하교를 기다리는 학부모, 코너 카페에서 커피를 사와서 마시는 시민, 하교 후 친구들과 뛰어 노는 아이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2021년 처음 조성된 보행광장은 2024년 5월에 시민단체인 “APS l Baconiani”에 의해 색이 바래고 벗겨진 부분에 다시 페인트칠을 하는 유지보수가 추진되었고, 현재까지 시민들이 관리하는 공공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시민을 공공공간 주인으로 만드는 '협업 협정'


이러한 시민참여 유지관리가 가능한 것은 앞서 살짝 이야기한 ‘협업 협정(Collaboration Agreement)’ 덕분이다. ‘협업 협정’이란 밀라노시와 능동적인 시민이나 비영리 단체, 협회, 교육기관, 재단, 기업 등이 맺는 협정으로, 민관이 협력하여 다양한 형태의 도시 공유 자산을 관리하고, 유지개선, 활성화하는 방식을 정의하는 서면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이 협정은 밀라노시 ‘공유 자산 조례(Common Goods Regulations)’를 근거로 하는데, 이 조례는 도시 공유 자산의 유지, 관리, 재생에 대한 시민들의 참여를 규정하는 조례이다. 도시 공유 자산으로서 공공공간은 유형적인 공공 자산인 동시에 교육적 의미를 갖는 무형의 공공 자산이기 때문에 이러한 협정이 가능하다고 한다.


2019년 공모전 신청서에는 대상지에 대한 아이디어와 거버넌스, 그리고 유지관리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야 했다. 그리고 선정된 팀들은 이 유지관리 내용을 기반으로 행정과의 협정을 맺고 유지관리 의무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밀라노시 홈페이지에 따르면, 바코네 광장에 대한 협정의 공식 명칭은 “Piazzle Bacone : Liberi Passi (자유로운 발걸음)”이며, 협약 주체는 시민단체 “APS l Baconiani”, 행정은 밀라노 시 제3구청, 그리고 기술파트너 Win Win Office, Hypnos 라는 도시/건축설계사무소가 참여했다.


협약에 따라 시민단체는 바코네 광장에 대한 일상적 유지보수, 정원 관리를 담당하는 대신, 광장에서 공공성있는 활성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게 된다. 시민단체가 ‘주인’이 되어 광장을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행정은 협약 맺은 단체가 광장의 ‘주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보조해주는 역할을 한다. 공익성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도록 광장 점용 및 활용 등 행정적 규제를 완화해주고, 보험 가입, 기술적 자문 등을 지원해준다. 광장 유지보수, 관리에 필요한 재료도 지원해준다. 물론, 이러한 협약은 시민단체가 폐쇄적인 이익단체가 되지 않도록, 지역의 대표성, 공공성을 갖는 개방적 구조를 운영될 것을 전제로 한다.


2019년 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대상지들은 대부분 임시 조성인 상태를 유지하면서 운영되고 있다. 영구화된 공간은 주로 밀라노시와 시민단체가 주도한 시범사업인 경우가 많다. 아마도 협정을 통해 시민들이 꾸준히 유지관리하고 활성화하는 공간은 잘 운영되고 있으니 영구화 순위에서 밀리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구글 로드뷰로 확인해보면 임시 조성이긴 하지만 잘 관리되고 있다보니 활기찬 공공공간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밀라노의 데르가노 광장은 오랫동안 자동차 30대가 점유한 주차장이었다. 그 공간에 페인트를 칠하고 벤치 몇 개를 놓았을 뿐인데, 동네 주민 누구나 쓰는 '제2의 거실'이 되었다. 밀라노시가 처음부터 완벽한 광장을 설계하고 공사를 시작했다면, 그 광장은 지금쯤 존재했을까? 아마 주민의 반대와 예산 부족, 긴 행정 절차 속에 묻혔을지 모른다.



숨쉴 수 있는 도시를 위하여
내연 자동차를 친환경 자동차로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자동차 공간을 삶의 장소로 만드는 "공간 전환"이 필요하다.


사실 밀라노가 이 실험을 시작한 것은 단순히 보기 좋은 광장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EU 대기질 기준을 수년째 초과하며 집행위원회의 압박을 받던 도시가, 자동차가 점유한 공간을 사람에게 돌려주는 방식으로 문제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었다. 한국도 대기질 문제는 오래된 숙제다. 그런데 한국이 대기오염에 대응하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노후 경유차 조기폐차 지원, 전기차 구매 보조금처럼 개인 자동차를 더 친환경적으로 바꾸는 데 집중되어 있다. 밀라노는 자동차가 점유한 공간 자체를 사람에게 돌려줌으로써 차량 통행을 줄이고, 그 자리에 보행광장을 만들었다. 대기질 개선과 공공공간 확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것이다. 자동차를 바꾸는 것과 자동차가 차지한 공간을 바꾸는 것, 한국의 대기질 정책에는 아직 후자가 부족하다.


제도는 조금씩 바뀌고 있다. 보행자우선도로가 생겼고, 생활도로 설계 기준도 마련되었다. 한국에도 시속 30km 제한구역 제도가 있다. 하지만 그 실천 방식은 대부분 노면을 빨갛게 칠하거나 숫자를 새기는 데 그친다. 반면 밀라노는 30km존을 만들면서 차도를 줄이고, 사선주차를 교차 배치해 S자형 도로선형을 만들었으며, 그 위에 벤치와 화분을 두고 보행광장을 조성했다. 운전자가 표지판을 보고 속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도로의 생김새 자체가 자연스럽게 감속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2차원의 페인트가 아니라 공간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3차원적 접근, 한국의 30km존이 아직 갖추지 못한 부분이다.


시민참여의 문제도 있다. 한국에도 공동체 기반의 상향식 실험은 적지 않았다. 골목길 재생, 마을만들기, 주민참여예산 등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왔다. 하지만 많은 경우 사업이 끝나면 관심도 함께 사그라들었다. 지속성이 부족했다. 밀라노의 바코네 광장이 2021년 조성 이후 2024년에도 시민단체 손으로 다시 페인트칠을 하며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열정 넘치는 주민들 덕분만이 아니다. '협업 협정'이라는 제도적 구조가 시민단체를 광장의 법적 '주인'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관리 의무와 함께 공간을 기획하고 활용할 권한을 부여하는 이 구조 설계야말로, 한국의 시민참여 사업이 반복적으로 부딪혀온 지속성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아닐까.


완벽한 해법이 아니라, 실험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밀라노가 보여준 것은 거창한 마스터플랜이 아니었다. 학부모와 자전거 동호회가 손을 잡고, 주민들이 직접 붓을 들었다. '어차피 큰 공사도 아니니, 잠깐 바꿔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라는 실험정신이 도시를 바꾸었다. 물론 밀라노의 대기오염 문제가 해결될 것은 아니다. 포강 유역의 분지 지형이라는 구조적 한계는 어떤 정책으로도 단번에 극복하기 어렵다. 하지만 자동차가 점유한 주차장 한 켠에 벤치를 놓고, 주민이 그 공간의 주인이 되는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 작은 실험들이 쌓여 도시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어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완벽한 해법이 아니라, 실험할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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