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선영 Sep 14. 2018

양화대교 가는 길

울창한 나무가 주는 찰나의 위안, 그리고 일상녹지에 대한 권리

나는 나무를 좋아한다. 크고 울창해서 그늘을 주기도 하고, 상쾌한 공기도 주는 그러한 키 큰 나무를 가까이하는 것이 좋다. 뚝심 있게 단단한 기둥을 갖고 있으면서도 풍부한 초록잎은 유연하고 부드럽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워 보이는 모습이 나를 매료시킨다. 그렇다고 숲 속에 살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도시의 북적거림도 즐겼다가, 녹지가 풍부한 자연공간도 즐기고 싶다. 도시와 자연을 가까이에서 누리고 싶다. 도시에서 보는 울창한 나무들이야말로 대조적인 효과 덕분인지 더욱 매력적이다. 도시와 자연, 이 두 가지 상반된 성격의 것을 동시에 갖고 싶다는 것이 참 욕심일 수 있겠지만, 아마 누구나 이러하지 않을까.


무악동 통일로/ 작년 이맘때쯤 찍은 사진이다. 나는 도시 속 나무를 애정한다.


내가 도시의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에게서 산속이나 시골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져서이다. 콘크리트, 벽돌, 시멘트 등 차갑고 단단한 재료로 만들어진 고정된 인공환경 사이에서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 있는 모습 자체가 나에게는 감동적이기도 하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삭막한 도시의 건조공간 속에서 살고 있는 나무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물결을 치며 흔들리고, 계절에 따라 다른 색을 보인다. 주변 건물은 그대로인데 나무는 계속 변한다. 마치 사람들처럼. 그래서 나는 어쩐지 도시 속에서 나무를 볼 때, 찡하고 동질감이 느껴진다. 아 저 나무도 저렇게 사는구나 나도 잘 살아야지.


나무로부터 위안을 받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희한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런 사람이다. 가장 위안을 받을 때가 예전 출근길이었다.(지금은 아니지만) 보통 출근을 하거나 도심으로 나갈 때면 양화대교를 건너가는데, 특히 아침 출근 시간 버스를 타고 양화대교까지 가는 길에는 쉽게 얼굴을 찡그리게 된다. 버스에 사람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이 몸을 붙이고 서 있어야 한다. 사람들 간에 치이는 일은 너무나도 비일비재하여, "미안합니다"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하면 왠지 서울 아마추어가 되는 것 같기도. 아마 그 말을 부딪힐 때마다 해야 한다면, 출근시간 동안 10번은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한 버스에 탄 사람들은 서로 부딪혀도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엎치락뒤치락 서로 부딪히며 도로를 달리다 보면 어느새 자동차 전용도로에 진입한다. 그때부터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내 시선이 꽂히는 곳은 도로변 울창한 키 큰 나무들이다. 아침햇살이 비치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나뭇잎이 반짝거리는 모습이다. 이 풍경은 집에서 나와 이동하면서 처음 만나게 되는 자연성이다. 거리변 가로수가 있긴 하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대부분 풍성해지기 전에 가지치기가 되어버려 울창함보다는 빈양함, 옹색함이 느껴진다. 자연성이 느껴진다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양화대로 남단의 풍경을 마주하게 되면 나는 좀 다른 차원에 들어오게 된다. 방금까지 사람에 치이느라 뾰족해졌던 마음이 좀 풀리는 것만 같다.도시의 일상 속에서 눈앞의 문제에 골몰해 있다가도, 이런 자연을 접하게 되면 갇혀있던 시야와 사고가 확장된다. 도시 속 자연은 이런 효용이 있다.

양화대교 남단, 자동차전용도로에 둘러싸인 울창한 녹지/ 사람은 접근 불가. 마치 DMZ같은 비무장지대 같다. (출처: 다음지도)


특히 양화대교로 진입 램프 내 녹지공간은 마치 DMZ 비무장지대처럼 느껴진다. 도로 인프라가 건설된 후 사람이 접근할 수 없게 된 이 공간은 온전히 자연식물들의 서식지가 되었다. 소음과 분진, 오염물질 등을 차폐하기 위해 식재된 녹지공간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바닥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고, 나무는 곧게 뻗어 매우 울창하다. 이렇게 울창해질 수 있었던 것은 개발행위가 일어나지 않아서, 그럴 수 없으니 내버려 두어서 일 것이다. 이런 울창한 숲은 볼 수 있는 곳으로 오래된 아파트 단지가 있는데, 그런 곳들에서는 재건축되면서 울창한 고목들이 사라지곤 한다. 도시 속 울창한 나무와 숲 공간은 개발행위에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는다.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양화대교 진입부의 녹지공간은 이런 위험이 원천 봉쇄된, 위험 자체가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램프를 따라 올라가면서 이 공간을 내려다보게 되면, 마치 갑자기 내가 서울 한복판이 아니라, 숲에 와 있는 기분이 아주 잠깐 든다. 거대한 도로 구조물에 둘러싸여 갇힌 아름다운 현대미술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진을 찍어서 올릴까 싶기도 했지만, 나는 그 풍경을 카메라 렌즈가 아니라 온전히 내 눈으로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핸드폰을 꺼내려다가도, 그냥 눈으로 보기를 선택하게 된다. 그래서 매번 사진을 찍지 못한다.)




이 풍경 덕분에 나는 출근길 버스를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딱하고 짠한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겨우 시각적 체험만으로도 감사히 여겼다니.


그런데 과연 도시에서 온몸으로 자연을 느끼기는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 물론 공원에서 가능하겠지만, 생활 동선 상에서 길을 걸으면서, 울창한 나무의 시원함을 내 피부로 느끼고, 자동차 매연이 아니라 나무가 내뿜는 신선한 산소와 풀내음을 맡을 순 없는 걸까.


서울은 여기저기 크고 작은 산과 한강과 여러 하천이 흐르고 있어서, 평면적인 지도로 보면 녹지가 풍부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3차원 공간에서 이루지지 않는가. 우리에게 산과 한강은 '특별한' 날에 마음먹고 애써서 찾아가야 하는 공간이다. 출퇴근과 같은 일상적인 생활 동선에서 산과 한강은 그저 멀리서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공간들이다. 내 피부와 내 코로 느낄 순 없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삶을 위해서는
일상녹지가 늘어나야 한다.

일상녹지에는 가로수, 띠녹지, 동네공원, 포켓파크, 놀이터(나무와 모래가 있는 경우), 그리고 추가적으로 개인정원, 개인화분 등 민간의 녹지공간도 포함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대부분 공공시설로서 가로공간에 존재하거나, 가로공간에 접해있다. 우리가 걸어 다니면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일상녹지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보기 힘들다. 특히 집값이 비교적 저렴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주거지역에서는 더욱 어렵다. 반면에 집값이 높은 주거지, 그리고 아파트 단지는 상대적으로 녹지를 체험하기 수월하다. (아파트 단지는 사실 공공녹지가 아니라 사유화된 녹지라 성격이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고자 한다.)


나는 행복한 개인들이 모인 사회가 지속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가 행복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나의 행복은 내가 주체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내가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여건들도 존재한다. 여기에는 공공공간의 질적 수준도 포함된다. 공공공간은 간접/직접적으로 나의 행복, 내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적어도 공공공간이 조금이라도 좋아진다면, 내 삶의 질이 1% 정도는 좋아지지 않을까? 개인적인 스트레스 요인은 차치하더라도, 일단 짜증 나고 빨리 지나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머무르고 싶은 쾌적한 공공공간이 내 일상생활 공간이라면, 그리고 그곳에서 자연성을 느낄 수 있다면, 조금은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공공공간에서의 불편함과 짜증이 조금이라도 줄어들면, 행복한 개인과 행복한 타인이 좀 더 많아질 수 있지 않을까.


서두에서 얘기했듯, 도시성과 자연성을 한 번에 모두 누리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결국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 기본권 차원으로 볼 수도 있다. 공간복지 개념으로 볼 필요도 있다. 가난하더라도, 몸이 불편하더라도, 도시에서 산다면 누구나 삶의 장소에서 자연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정신건강과 몸 건강 모두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상녹지를 늘려야 한다는 나의 의견은,

어쩌면 인구 천만 거대도시 서울에서 불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은 토지이용의 문제일 텐데, 자본의 논리에서 본다면 어불성설일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장기적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도시와 사회가 되어야 자본의 논리도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므로 일상녹지를 확보해나가는 것은 결국 자본의 논리에도 맞으면서, 자본이 없는 개인들의 기본권도 지킬 수 있는, 궁극적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택가 골목이 불편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