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디 Jul 03. 2020

Y와 종로역, 텐동집

걷잡을 수 없이 낭만적인 순간들에 대하여

 오랜만에 Y와 만났다. 그는 신기하게도 2년전에 봤던 얼굴 그대로였다. 잘 지내냐는 짓궂은 인사로 시작된 만남은 우리가 2년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치고는 순탄히 이루어졌다. 오랜만에 느글거리는 게 먹고싶다는 말에 튀김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사실 나는 술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아직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저것 많은 술 종류를 알고 있고 취향도 확고하다. 나는 발효주를 좋아한다. 맥주 막걸리 이런 것들. 다 알고 있으니 술자리가 부담스럽지 않고, 항상 즐겼던 나인데 술을 마시지 않는 친구를 만나면 대처가 애매해진다. 나만 마셔야 할 지 마시지 말아야 할 지. 


 Y와는 결국 약속한대로 술 대신 밥을 먹었다. 튀김류가 먹고싶다는 내 말에 Y는 그럼 너 먹고싶은 걸로 먹자며 순순히 내 뒤를 따라왔다. 우리는 종로에 있는 유명한 텐동 집으로 향했는데, 가는 길에서 조금 헤맸었던 것도 같다. 

 텐동집은 유명하다는 명성에 비해 웨이팅이 긴 편은 아니었다. 하기야 퇴근시간의 종로라고 하면, 어디라도 한 두 팀정도는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우리는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 2년 공백의 기간동안 서로의 삶에 대해 간단히 질문했다. 잘 지냈어? 한 마디로 끝낼 수 없는 이야기들. Y를 내가 마지막에 봤을 때 그는 대학생이었는데 이제는 전공과 관련된 곳에 취업해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잘 됐다. 하고 맞장구를 쳤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갓 튀긴 냄새들이 통통 코 안으로 튀어들어왔다. 나는 긴 행사를 마치고 온 길이라 굶주렸고, 그도 마찬가지였기에 들어가자마자 봐두었던 메뉴를 주문했다. 메뉴가 나오는 데는 약 십분 정도 걸렸던 거 같다. 메뉴를 기다리며 우리는 저게 우리 꺼 아닐까, 저건 아닐까 하며 시덥잖은 일들로 시시덕거렸다. 

 텐동. 적당히 식은 밥 위에 뜨겁게 튀겨낸 튀김이 여러 개 올라가는 음식으로, 일식집에 가면 심심치않게 마주칠 수 있는 음식이다. 최근 백종원의 '골목식당' 열풍으로 텐동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고 우후죽순 텐동 가게들이 생겨났다. 사실 우리가 텐동을 먹으러 가게 된 것도 그 방송 때문이었다. 밥 위에 올라간 튀김을 백종원 대표가 바사삭! 하고 먹는 순간에 입 안에 도는 군침. 그 소리를 듣자마자 청각적인 것이야말로 인간의 식욕을 자극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ASMR처럼. 


 우리는 비빔우동-통통한 우동 면 아래 자박하게 쯔유 소스같은 것이 깔려있고, 볶은 고기 고명, 튀김 가루, 대파, 수란이 있다.-과 튀김세트-파프리카, 닭안심, 크림치즈 어묵, 꽈리고추 튀김-, 에비텐동-새우 튀김 덮밥-을 시켰다. 두 명이서 메뉴 세 개, 게다가 셋 다 튀김이라 물리지 않을까 걱정됐다. 다 나온 상을 보니 그런 고민보다는 얼른 먹고싶다는 생각만 들었지만. 

 비빔우동을 섞으며 서로 다니는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닭 안심 튀김을 한 입 먹자마자 아, 맥주를 시켰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깔끔한 것이 필요했지만 단무지로 충분했고 술을 먹지 않아도 그대로 즐거웠다. 

 Y는 지금 직장이 적성에 맞고, 괜찮다고 말했다. 회식은 힘들지만. 나는 적성에는 안 맞지만 사람들이 좋았고, 그래서 떠나기 싫었지만 아마 그렇기에 떠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Y는 다 좋은데 왜 떠나냐고 물었다. 


그냥. 사람들은 좋은데 일이 적성에 안 맞으면 꾸역꾸역 다닐려고 할 거 아니야. 근데 그러다가 내가 탈 날까봐. 


 가볍게 대답하는 내 말에 Y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다닐 거 같은데, 하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장난스러웠기에 웃어넘겼다. 튀김은 은근히 내 배를 불려왔고 솔직히 말하자면 우동을 반쯤 먹었을 때 이미 배가 불렀다. Y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밖에 못 먹냐고 했지만, 정말 위장에 빈틈없이 튀김이 가득 찬 기분이 들었다. 


 밥을 다 먹고 오랜만에 술집 다음 술집이 아니라, 밥집 다음 카페로 향했다. 향하는 길에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넌 2년 전에도 길치더니, 아직 길치인 거 못 고쳤냐는 Y의 말. 그런 Y의 말에 길치인 걸 어떻게 고치냐고 괜히 반박하는 나. 그리고 이상한 길로 빠지는 Y를 보며 너도 지도볼줄 모른다고 다그치는 나까지. 별 것도 아닌 일로 계속 웃을 만큼 어제의 우리는 즐거웠다. 고작 그런 일들로 신나게 웃었다. 


 카페에서는 좀 더 긴 이야기들을 나눴다. 내가 지금 어떻게 지내고, 뭘 하고싶은지, 또 과거에 알던 누군가는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앞으로 내가 하고싶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두 번 정도 멈칫거렸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 하고싶다고 이야기만 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나를 가로막아서. 

 Y는 예전부터 내가 말을 멈출때면 꾸짖거나 채근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내가 두 번 쯤 말을 더듬고 잠시 멈추었을 때도 Y는 기다려주었다. 내가 다시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는 조용히 기다려줄 수 있을 거 같았다. 


하고싶은 게 많다는 게 좋은 거지. 그리고 하고싶은 거 할 때잖아. 


 Y의 웃음 섞인 대답을 끝으로 내 고민이 조금 풀렸다. 그래, 하고 싶던 거 해야지. Y와 웃고 떠들며 또 느꼈다. 주변에 내가 하는 일을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생각하면서. 


 Y와 나는 종각역을 찾아 종로 길거리 한복판에서 헤맸다. 담배 냄새, 술 냄새,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 불이 번쩍이는 전광판. 씨티팝 뮤직비디오에 나올 것 같은 밤 거리에서 우리는 길을 헤맸다. 짧았지만 낭만적인 것 처럼 느껴졌다. 데면데면한 거리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 낭만적인 밤이다. 


 우리는 집에 가는 전철에 나란히 앉아 이어폰을 한 쪽씩 꽂고 노래를 들었다. 나와는 취향이 정 반대인 Y의 플레이리스트에 내 취향의 노래들을 꽉꽉 채워넣었다. 그 중에서 Y가 좋다고 한 노래는 9와 숫자들의 '창세기' 하나 뿐이었지만. Y는 나직하게 노래 좋다고 이야기했고, 그 즈음 우리는 회기역을 지나치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전철 안에서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 나는 입 속으로 창세기의 가사를 되뇌었다. 그대는 내 아침의 별. 그대는 내 공기의 열. 수억 광년 어둠을 뚫고 날 부르는. 덜컹거리는 소리에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노랫소리 보다 더 크게 들렸지만. 

 Y와 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의 버스 안에서 나는 들었던 노래를 계속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다음에는 뭘 먹으러 갈까. 오랜만에 술 없이 누굴 만나는 것도 재밌다. 재밌었지, 응. 하고. 술이 싫은 밤은 없지만, 술이 없어도 좋은 밤이 있는 법이니까. 


20200703

매거진의 이전글 H와 짧은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