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디 May 26. 2020

H와 짧은 밤

노가리와 맥주, 그리고 낭만적인 도시의 불빛


언제 밥 한번 먹어야지. 


 인사치레 같던 내 말을 '나는 그런 거 빈말로 안 넘겨.' 하고 받아치던 너를 만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기억나진 않았다. 그저 특이한 담배를 피우던 사람, 손가락이 긴 사람, 안경이 특이하던 사람.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추웠던 날 너의 청재킷이 예쁘다고 생각했으며, 너의 바지가 맵시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짧은 순간 별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었고 몇 번의 안녕을 반복했다. 

 

 H와 다시 연락하게 된 건 최근의 내 이별 때문이었다. 이별 후에 힘들어하던 중, 홧김에 이 사람 저 사람과 약속을 잡았다. 사실 H와의 약속도 그렇게 잡힌 것이었다. 처음에는 안부만 물을 요량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래 만나자! 가 되어 만나게 되었다. 

 자주 다니던 거리의 카페에서 그를 기다리며 시덥잖은 생각을 했다. 내가 너무 바뀌어서 못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지 못하면 어떡하지. 우린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왜? 우리가 왜 만나게 되었지. 하는 생각. 그러나 도착했다던 H의 말에 머릿속의 짧은 고민들은 지워졌다. 


 밤은 짧고 우리는 둘이었기에 발길 닿는 대로만 걸어도 어디든 갈 수 있었다. 토요일 오후의 번화가는 코로나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로 자리가 붐비었고, H는 자기가 아는 가게가 있다며 거길 가자고 했다. 


노가리 좋아해? 


노가리? 좋아하지. 간단하게 먹기 좋잖아. 


 서로의 안부보다 건조하게 앞으로 먹을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간단히 맥주를 한 잔 하자는 말. 그리고 H는 가게로 가는 길 피곤이 깔린 목소리로 낮게 말을 읊었다. 


원래 그 가게가, 여기 있었어. 그 때는 위생이 좀 .. 불편할 정도였고, 협소하고 포장마차 같은 느낌의 가게였는데. 이제 옮겨지고 나니까 깨끗해졌어. 깨끗해진 건 좋지만 포장마차같던 느낌이 사라져서 그게 좀 아쉬워. 


 나는 그가 생각보다 말이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H는 담배를 피우겠다고 했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앞에서 그간의 안부를 조심히 물었다. 잘 지내고 있냐고, 공부는 잘 되느냐는 질문. 그냥 그렇지 뭐, 하고 슬쩍 웃는 것을 보니 대충 살펴도 그가 힘들다는 것 쯤은 가늠할 수 있었다. 

 H와 술을 많이 마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술이라는게 언제나 그렇듯이 덮어놓고 먹다보면 내가 얼마를 먹었더라, 내가 얼마나 마셨더라 하고 한 잔 더! 를 외치게 되니까. 오늘은 정말 조심하면서 먹자는 다짐을 한번 더 했다. 두 시간 쯤 지난 후엔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다짐인지를 알게 되었지만. 

 밤이 조금 차갑고 쌀쌀했지만 바깥의 테이블에는 사람이 많았고, 우리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H는 물어보지 않고 노가리 두 개, 오백 두 잔을 시켰다. H는 계속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말하려다 말고.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노가리가 나왔다. 짭짤하고 고소한 냄새. 기포가 퐁퐁 올라오는 노란 맥주 두 잔. 술자리의 예의처럼 우리는 잔을 부딪혔다. 


 이야기의 시작은 얼마 전 끝난 내 연애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일 년을 답답한 연애를 이어왔다. 핑계인 걸 너무 잘 알면서도 놓아주고 싶지 않아 질질 끌던 연애. 결국에 비겁하고 치졸하게 끝난 연애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요 근래 많은 사람과 만나 이야기하며 느낀 것은 내가 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든지, 내게 좋은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냥 누군가에게 이렇게 뭘 털어놓는 거 자체가, 나를 깎아먹는 일인 것 같아.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한숨을 쉬며 이야기하는 나를 H가 빤히 보았다. 나는 정말 그렇게 느꼈다. 내가 J와의 이별에 대해 나쁘게 말하고 한숨을 쉬고 우는 모든 행위들이. 나 자신을 깎아먹는 일이라고. J를 위해 내 시간과 감정을 쏟는 것 자체가. 

 H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찰나였다. 


그게 너를 깎아먹는다는.. 말은 아닌거같아. 그냥 나는 너를 잘 모르지만. 


 잘 모르는 사람 둘이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하며 이어진 술자리가, 조금 재밌었다. 그 즈음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간간히 안부만 묻던 사이인 사람을 왜 만나러 나온 건지. 사실 무슨 생각이었을지. 먼저 솔직하게 말을 건넨 쪽은 H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나올지 말 지를 한참 고민했다고 했다. 근데 그냥 사준다니까. 맥주나 한 잔 마시자는 생각으로 나왔다고. 그래서 오늘의 대화가 재밌다는 내 말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나는 H를 잘 몰랐고,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애초에 서로 다른 조각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처럼 이야기하는 것 마다 조금씩 핀트가 어긋났지만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니 그것조차 재밌었다. H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몇 가지 더 던졌고 나는 슬슬 웃었다. 아무래도 술이 들어가긴 한 모양이다.

 H와 나는 점점 목소리가 커졌고, 술집 안의 분위기는 들떴다. 상기되고 있었다. 옆 자리의 술취한 산악동호회같은 인간들은 점점 소리를 질렀고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이겨먹으려고 소리를 왁 왁 지르다가 제 풀에 지쳐 연거푸 웃음만 터뜨렸다. H는 그 즈음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옮겨도 되나? 공부 안 해도 돼?


하고 묻는 내 말에 H는 슬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공부를 걱정하는 사람이, 술 사준다고 여길 불러내? 


 나는 다시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웃었다. 맞지. 맞아. 불러내지조차 말았어야 맞지. 그러고 나눈 뒤의 몇 마디를 나는 수첩에 적었고 H는 그걸 뭐하러 적느냐며 물었고. 우리는 2차에서도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우리 집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 강아지 이야기, H의 요새 삶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미묘했던 날들의 이야기도. H는 약간 취한 듯 보였고 간간히 나갔다 들어와서 옷에 묻은 담배냄새가 내 머리를 어지럽혔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딱 몇 개의 단어들로만 표현할 수 있는 밤이었다. 맥주, 노가리, 담배 그리고 새벽 세 시 횡단보도의 불빛들. 


  H와는 지나면 잊힐 수도 있는 순간을 함께 나눴다. 어차피 마지막에는 안녕 하고 헤어졌으니 다시 만날 수도, 만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연락하지 않으면 만나지도 않을 사이. 큰 도시 사이에서 낭만적으로 헤어졌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사이. 나는 집에 돌아가면서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조금만 더 낭만적이었더라면, 도시의 불빛이 다 사라질 때 즈음 안녕을 말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한편의 시처럼 짧고 간결하게 남기를 바라며 차 안에서 약간 코를 골았다. 생각해보면 지난 것들은 다 잊히기 마련이고.. 다음에는 누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까. 항상 끝이 모호한 이야기를 나누고 오는 것 같다는 생각들도 함께 안고 집으로 향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