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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Mar 13. 2021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오후에

내가 사랑하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기록.

 가끔 술에 취한 밤이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네게 잠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 꼭 오늘 같은 밤이면. 네 눈빛에 마주치면 나는 할 말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버벅거렸고, 목소리가 들리면 온 몸이 그쪽으로 끌려갔어. 오후 3시 쯤.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오후에 인천행 1호선 지하철을 타고 지상을 지날 때, 스며드는 햇빛과 내게 기대어 귓가에 사락거리는 네 머리칼을 떠올리면 말이야. 밝은 빛의 갈색. 그 시절 나에게는 무엇보다 찬란했던 네 머리칼. 살짝 기운 어깨에 기대어 꾸벅 조는 너를 내려다보면. 나는 행복해졌어.


 네가 가지고 다니던 카메라가 멋져 보여서 세 달을 아르바이트 한 돈을 모아서 나도 같은 카메라를 샀던 거, 기억 나? 카메라를 만질 줄도 모르면서 나는 그저 너와 같은 것이 좋아서. 카메라를 가지고 허둥거리던 나를 보고 네가 하나씩 찍는 법을 알려줬잖아. 내가 처음 찍은 순간은 네가 웃는 얼굴이었어. 내 처음은 항상 너였을지 몰라. 또 느즈막한 노을 빛 아래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너의 사진을 다시 볼 때면 나는 다시 사랑에 빠져. 시간도 공간도 초월해서 같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라는 게 가능했다는 걸 이제야 알아. 너를 알고, 나는 사랑을 알았지. 그간의 시시한 감정들이 아니라 이런 게 사랑이구나. 너를 바라보는 순간, 너를 만나는 순간, 마주보는 순간.


 그리고 우리가 같이 여행을 갔던 곳. 나는 생에 처음으로 그런 멋진 노을과 바다를 보며 어린아이처럼 까르르 웃었던 것 같아. 물론 그때도 지금도 나는 어린 아이가 맞지만. 밀려오는 파도에 부서지는 윤슬을 보면서 생각했어. 지금같은 순간이 영원으로 머무른다면 단 하루도 지루하지 않게 저 파도만 바라보고 싶다고. 물론 그 때의 너와 함께. 

 뭘 잘 모르던 시절의 사랑은 참 애틋하고 간절한 것 투성이야. 


 비가 내리던 날 우리가 마지막으로 했던 전화, 기억해? 기억하지 못하기를 바라지만. 나는 너와 아무렇지 않게 연락하는 사이가 되고 싶거든. 그 날 나는 울었어. 너와의 마지막을 직감해서. 그런데도 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내 우는 소리를 들어줬어. 너무 힘들면 얘기 안 해도 돼. 그 말에 나는 한참을 더 울었어. 지겨울 법도 한데 너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계속해서 내 울음 소리를 들었어. 그러다 너도 울먹이는 소리로 얘기했지. 네가 슬프다니까 어떻게 해야 될 지 모르겠다고. 다른 사람들이 슬프다 외롭다 힘들다고 하면 뭐 그런 것 가지고 그러냐, 술 한잔 하자는 말로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네가 그렇게 울면 나는 그럴 수가 없다면서. 네 말에 내가 코를 훌쩍이면서 대답했었지. 그래 그럼 나도 술 한잔 사줘. 하고. 


 그런데 모든 사랑이 그렇듯이,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무엇도 영원할수가 없지. 영원한 사랑이라는 건 아무래도 디즈니나, 전래동화의 마침표에만 있는 거니까. 그런 문장을 본 적이 있어.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모든 마무리는 사랑이 '시작'할 때 끝나기 때문에 행복한 거라고. 그렇지. 사랑이 시작되는 모든 순간은 아름다우니까. 그리고 영원히 행복할 것 같으니까. 


 그러나 지금 사랑했던 모든 순간의 너와 헤어졌지만 나는 잘 먹고 잘 살아가고 있어.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사랑이 끝나면 내 세상이 종말하는 줄 알고 살았던 때도 있지만. 낯선 이별에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던 날들도 있지만. 그런 날들에서 하나 배운 일은 뒤돌아보지 말자는 거였어. 어떻게 이별하고 어떻게 살아가던지. 그래요, 당신의 삶을 잘 사세요! 로 끝나야 좋다는 거.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고 나면 나머지는 더 엉망진창이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니까. 그리고 몇 번의 이별을 겪고 나서도 남아있는 것들이 분명 있으니까.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나와, 그런 나를 말없이 몇 번이고 찾아주는 사람들. 


 그래. 돌아보지 말자는 말을 잘 생각하고 살게. 그렇다고 너를 잊는 게 아니라, 너와 행복했던 많은 모든 순간들을 추억하면서 그 때 재밌고 좋았지. 햇살에 바스락거릴 것 같은 너의 곱슬을 사랑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꿈꾸고, 기약없는 이상한 약속을 사랑하던 때를. 그러니 오늘도 잘 지내. 

 봄이 오려나 봐. 오늘은 부슬비가 내리더라. 네가 비를 좋아했잖아. 

 봄이 오면, 한 번쯤은 잘 지내냐고 묻고 싶으니까. 잘 지내. 


20200313

사랑하던 모든 이들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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