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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Jul 12. 2020

최와 비오는 밤, 영화

조조래빗, 맥주, 맥주 맥주!

사랑하는 많은 장면들 중 하나.

 최와 만났다. 이제 최와 만나는 것은 놀랍지도 않고, 딱히 큰 행사도 아니지만 우리는 만나면 항상 웃음꽃을 가득 피우며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니까. 최는 자신의 피곤한 일주일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퇴사한 것에 대한 기쁨을 내비쳤다. 최는 부럽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불안하고 기약없는 기다림이 가득할 앞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두려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지만 꾸며대지 않고 말하자면 나는 당분간 대충 살아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최의 이야기를 웃어넘겼다. 

 우리가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바깥을 쳐다보며 나는 문득 '숲에 갔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최에게 이야기했다. 그냥 숲에 갈 걸 그랬다고. 숲도 오늘 만남의 후보군에 없었던 것은 아니나 숲은 좀 그렇지, 하는 최의 말에 자리를 맥주 집으로 옮겼던 것인데 최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그럼 그걸 좀 더 강력하게 주장하지 그랬어. 


하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한 최의 말투나, 비 오는 소리, 맥주 한 잔, 맛있는 짜장 라면이 모든 상황을 재밌게 만들어주어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말 잘했다 너. 그치 내가 좀 더 강력하게 주장할 걸 그랬어. 


 최는 어떤 부분에서는 아주 고집스럽지만 사실 귀가 얇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아마 내가 한 두번 정도 더 물었더라면 숲으로 향했을 것이다. 최는 평소에도 치킨이 먹고 싶다, 고 했다가 내가 아 근데 나는 오늘 면이 좀 먹고싶네 하고 이야기하면 그럼 다른 곳으로 갈까? 하고 팔랑이는 인간이니. 


 최와의 술자리의 시작은 딱 한잔 부터다. 우리 오늘 딱 한 잔만 먹자. 이제는 슬슬 알 때도 되었지 않나? 우리는 한 잔만 하는 법이 없다는 걸. 나는 최가 대체 왜 그런 약속을 자꾸 다짐하는 지 모르겠다. 양심의 가책만 쌓이고 피로만 누적될 뿐이지. 나는 슬슬 인정하기로 했거든. 우리가 한 잔만 하는 법이 없고, 언제나 우리의 술자리가 너무 즐거워서 끝내기 싫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매번 한 잔은 아쉽고, 두 잔은 더 아쉽고, 세 잔은 모자라다. 그리고 세 잔쯤 주문했어도 아니 아직 이렇게나 할 말들이 많은데! 하는 이야기를 마치는 술자리인 것이다. 


 최는 두 잔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시다가, 세 잔 째를 주문하려고 하자 그러면 한 잔만 시켜서 나누어 먹자고 했다. 사실 그것도 항상 같은 레퍼토리다. 한 잔만 더 시켜서 나누자, 한 병만 더 시켜서 나눠 먹자. 그러나 그래 봐야 나중에 쌓이는 것은 술값과 '이럴 거면 각자 한 잔씩 마실걸' 하는 생각 뿐이지만. 


 술을 마시는 동안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소나기는 그칠 것 같지 않게 내렸다. 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보면서 최는 비 안 그칠 거 같은데, 다 맞으면서 가야되나.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비오는 날 영화 보는 거 좋지 않아? 하고 최를 꼬시기 시작했다. 사실 이 방법은 최와 술을 더 먹고 싶을 때 내가 종종 써먹는 것인데, 최는 한 곳에서의 술자리가 길어지는 걸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바뀌지 않는 풍경을 지루해하기 때문에 살짝 주제를 틀거나 술이 주가 아닌 다른 것을 제안하면 쉽게 받아들인다. 거기에 꽤 열심인 내 설득까지. 결국 최는 비오는 날, 지하에서 조용히 맥주를 한 잔 마시며 보는 영화가 어떻냐는 나의 말에 홀라당 넘어왔고 우리는 저녁도 밤도 아닌 늦은 오후에 영화를 보러 DVD방으로 향했다. 


 퇴사하게 된 기념으로 2차 영화는 내가 사겠다는 말에 최는 그럼 자신은 맥주를 사겠다고 했다. DVD방 옆의 편의점을 들러 각자 마실 맥주를 한 캔씩 고르고 빵빵하게 가방에 집어넣었다. 자꾸만 입술이 씰룩거리며 웃음이 비죽 새어나왔다. 별 거 아닌 걸로도 행복한 밤. 얼마나 좋은지. 

 DVD방에서 우리는 영화를 고르는 데 한참이 걸렸다. 오늘도 느낀 거지만, 최와 나는 술 취향 말고는 딱 들어맞는 것이 별로 없는 사이인 것 같아. 그렇기에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는 거겠지만. 우리는 공포영화를 보면 어떨까 하는 말을 하며 들어갔지만 고른 것은 최가 재밌을 거 같다고 추천받았다는 '조조래빗' 이라는 영화였다. 나는 처음 조조래빗의 포스터를 보자마자 '별로 재미없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최의 강력한 주장으로 보게 되었다. 영화를 보러 오자고 조른 것은 나고, 최의 내일 출근 전 시간을 빼앗은 것도 나였으니 이 정도는 양보해주자! 하는 마음으로 보게 된 영화 . 이 때는 내가 엉엉 울며 영화관을 나올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영화, 조조 래빗

 조조래빗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리뷰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지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조조래빗은 감동적인 B급 블랙코미디같은 느낌이 드는 영화다. 나는 이 영화가 개봉한 지 오래 되었나 싶어 찾아보았지만 놀랍게도 올해 초에 개봉한 영화였다. 그러나 오래 지난 시절에 대한 감성을 이렇게까지 멋있게 담을 수 있나? 싶은 장면들이 많았고, 나는 조조래빗이 다 끝나고 나서는 박수를 치며 약간 울었다. 사실 아주 엉엉 울었다. 최는 엉엉 우는 나를 보면서 감동적이긴 했는데.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눈물을 터뜨리다니, 신기하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그 이야기를 하는 최를 보지도 못했다. 눈물이 자꾸 앞을 가리니까. 웃기지만 슬픈 순간. 아니다, 웃기지만 감동적인 순간. 


 영화가 시작했을 때 우리는 술을 마시고 꿈뻑이고 있는 상태였고, 중반부가 지날 때 즈음 맥주 한 캔을 거의 다 마셔갔지만 집중을 잃지 않았다. 조조래빗은 사람을 천천히 빨아들이는 힘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다른 누구보다 영화에 잘 몰입하는 인간으로서 다른 모든 영화들도 빠져들어 감상하는 편이지만. 최가 감동적이었다고 이야기 할 정도인 것을 보니 조조래빗이 잘 만들어진 영화임은 분명했다. 나치즘에 대해 비판하는 영화라고만 알고 봤던 걸 치고는 꽤나 감동적이고 깊이있는 영화였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서 우리는 공포영화를 봤다면 이렇게 여운이 남지 않았을 거고, 그저 덜덜 떨면서 너무 무섭다는 말이나 중얼거리며 집에 갔을 텐데. 조조래빗을 보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고 너무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글을 적는 지금까지도 나는 여운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다. 이 여운이 다 가시기 전에 영화 리뷰도 적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걸 보니, 나는 이 영화가 아주 아주 아주 많이 마음에 들어온 모양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헤어졌다. 잘 가. 서로 집에 조심히 가야 하니까. 최와 헤어지고도 나는 조조래빗의 장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사진을 많이 찍어두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 문이 열리기 전,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좋은 영화를 많이 보고, 많이 쓰자는 다짐.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최와 짧은 통화를 했는데 나는 스스로 감정과잉이라고 생각했으나 최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또 약속했다. 더 좋은 영화를 많이 같이 보자고. 또 이렇게 여운에 가득 차서 집에 갈 수 있는 하루가 생기길 바라자고. 최는 그러자고 이야기하다 하품을 했고, 그가 피곤한 듯 해 이제 끊자고 이야기했다. 


 집에 가는 길. 비는 그쳤지만 마음은 일렁였다. 찰박거리는 소리, 버스가 지나가는 소음, 고성방가를 일삼는 아파트의 취객들도 다 아름다워 보였다. 다음 술자리는 또 언제가 될까. 최와 함께하는. 약속하지 않아도 또 만나겠지. 우리가 늘 그랬듯이. 


20200712


조조래빗,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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