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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Jul 04. 2020

별로 아무것도 아닌 것들

200704

1. 

 사람은 어떠한 가치로 평가하거나 매길 수 없다.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재화가 아니고, 동산이나 부동산이 아니며 어떠한 수치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2. 

 그래서 실은 "내가 가치있는 사람인 지 확인받고 싶다."는 말에 연민이 일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3. 

 감정은 파도와 같아서 밀려오면 쓸려 내려갈 때도 있는 법이다. 밀물과 썰물. 들이닥칠 때는 허우적거리며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빨려들어가지만 쓸려 내려가기 시작하면 한없이 뒷걸음질쳐 나를 질퍽한 뻘에 혼자 남기고는 한다. 모든 감정이 그렇다. 비단 사랑 뿐만이 아니라. 

 혼자 남겨진 뻘에서 자꾸 빠지는 발을 건져내며 뭍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는 뭍으로 올라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네가 언제 밀려올까를 기다렸다. 내가 잠식되는 중인 줄도 모르고. 언제 다시 네가 내게 밀려올까. 언제 나를 다시 사랑하게 될까.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오지 않을까. 오늘은 오지 않을까, 내일은 오지 않을까를 기대하면서. 나는 뻘 바닥으로 깊게 빠져서 헤어나오지도 못하면서. 오지 않을 밀물을 기다렸다. 


4. 

 가치. 사람한테 가치가 어디 있느냐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현은 눈을 똑바로 치켜뜨고는 있지, 가치. 그래서 나는 너한테 가치있는 사람이야? 나는 엉망이야. 완전히 엉망이라고. 하고 대답했다. 자기연민에 빠져있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무어라 대답해야 할 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리고 현과 몇 번을 더 얘기한 후 깨달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의 입버릇은 내 말 끝에 항상 '거짓말' 하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아니야, 당신은 엉망진창이지 않아. 하고 이야기하는 내 말 끝에 '거짓말' 이 붙었고, 그 꼬리표가 붙고 나면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이유가 뭐냐고 되묻는 것에 잠깐이라도 머뭇거리면 이것 봐, 대답 못하잖아. 하고 이야기했고 나는 또 침묵을 지켰다. 


 그는 내 행동 하나하나 '거짓말' 이라고 이야기했고, 처음에는 그를 달랬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가 나를 진짜로 신뢰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나를 신뢰하고싶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냥 더 이상 나를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더 이상 내 마음에 대해 알고싶지 않으니까 그랬으리라. 자신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남을 공격하는 것. 자신이 다치고싶지 않으니 남을 상처내는 것에 대해, 나도 그랬으니 그를 이해하기로 했다. 


5.

 엉망이라고 생각했다. 내 마음이. 복잡하게 펼쳐놓은 것들이 정리되지 않고 나를 끊임없이 괴롭게 만들었으며 나는 그 안에서 같이 엉망이 되어갔으니까. 마음을 전부 차곡차곡 정리할 수는 없는 거지만, 펼쳐놓은 것들이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으니. 역시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옛 말이 틀린 것이 없다. 


6. 

 어슴푸레한 새벽이 될 때 까지 현과 나의 대화가 이어졌다. 때로 우리는 소리로 말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현은 다른 사람들보다 눈 색이 짙어서 그의 눈을 보면, 말하지 않아도 이야기가 오갔다. 소리를 내지 않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알 것만 같았다. 내 마음에서 비롯된 착각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때론 알았고, 때로는 몰랐다. 모를 때면 나는 말하는 것 대신에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감각을 떠올릴 때면 그 어떤 순간보다 그와 가까이 맞닿음을 느꼈다. 


7. 

 뻘 아래로 깊이 잠긴 내 마음은 누가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어서, 나는 스스로 나오기를 결심했다. 과정은 힘들고, 질척일 것이고, 빠져나오려 할 수록 더 깊이 빠질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감수하기로 마음 먹었으니. 


8. 

 바보같이 가치를 가지고 누구를 판단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도 그 즈음이었던 것 같다. 현과의 만남이 끊어지기 시작했을 때. 가치없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종이나 바닥에 그려진 선 따위가 아니라 3차원에 존재하는 입체적인 것이라 볼록한 면이 있으면 오목한 면도 있고, 오목한 면이 있으면 뾰족한 면도 있는 것이기에. 명확한 기준 없이 누군가의 가치와 존재의 이유를 결정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9. 

 항상 싱그러운 여름이니 나는 엉망진창이 된 내 마음 바닥을 정리하고, 다시 쓸고 닦아 새 것처럼 보이게 만들 것이고, 현과의 일은 지나고 보니 다 좋은 추억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살다 보면 가끔은 떠오를 것이다. 낡은 간판이 즐비한 거리 가장 끝쪽에 있는 술집. 가로등 아래. 골목길 사이 식당에서 새어나오는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여름 새벽을 지날 때면 항상 생각날 것이다. 

 그렇게 매년 누구도 한번도 잊은 적 없이 살아가고 있으니. 서로에 대해 깊이 알아가던 시간들을 다 지났으니 없던 일로 하자, 하고 그냥 넘길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계속해서 곱씹어가며 살 거야. 


10. 

 언젠가 다시 밀려오는 파도에 정신없이 쓸려가게 된다면 그 때는 채비를 단단히 할 것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빠지더라도 살아갈 수 있도록. 


20200704

어느 새벽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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