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젤리인간과 젤리
나는 원래 잠이 많은 사람은 아닌데도, 요 근래 두 개의 일과 작업을 병행하고 있자니 어딘가 고장난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태엽이 덜 감긴 시계처럼 버벅이기도 하고 늘어지기도 하는 것을 보면. 어제는 낮에만 여덟 시간이 넘게 잠을 잤고 오늘은 오후 열 두시 반쯤 바깥의 소음을 듣고 깼다. 누군가에게는 열 두시쯤 일어나는 일이 그리 늦은 일이 아닐 수 있지만 스무 살 이후로 단 하루도 늦장부린 삶을 산 적이 없는 내게는 꽤나 큰 변화였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거리나 가게에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하는 이들도 꽤 있지만 사실 세상은 평소처럼 돌아간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여기저기를 누비며 눈을 마주치고 대화하는 것. 나는 여유롭게 걷거나, 급하게 뛰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항상 숨을 헐떡이며 뛰어다닌다. 아르바이트 시간에 지각할 것 같다거나, 지각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약속시간에 10분정도 전에 도착해야하는 습관이 급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 나를 급하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 일하는 곳은 집 근처의 프랜차이즈 카페다. 프랜차이즈라고 하면 엄격하고, 깨끗하고, 마음대로 하지 못해 조금은 답답하기도 한 일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3일정도 근무해보니 생각보다 이런 환경이 나한테 잘 맞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간의 무질서, 소음, 서비스직이지만 내 마음대로 하는 것들에 대해 물려있는 상태였는데 체계와 규칙이 확실한 곳에서 근무한다는 기분이 들자 스스로 책임감 같은 게 생겼다. 내가 일하는 시간만큼은 나도 열심히 잘 지켜가며 해야한다는 책임감. 고작 네 시간 삼십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항상 카페에 출근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전 타임에 수고한 분들과 인사를 나누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이 부족한지를 나누는 일인데 나는 이 시간이 짧지만 왠지 서로의 노고를 칭찬하고 인정하는 시간인 것 처럼 느껴져서 기쁘다. 짧은 대화를 나누고 나면 방금까지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은 또 다른 타인이 되어 일하는 곳을 떠난다. 수고하세요, 하는 말 한 마디로 같이 일하는 사이에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다시 만나야 한다는 점이 재밌다.
오늘은 잠이 덜 깬 채로 2구짜리 가스켓을 돌려 끼우고 커피를 내렸다. 프랜차이즈의 또 다른 좋은 점은 커피가 썩 괜찮다는 점이다. 기대하지 않아도 중간 정도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 물론 입이 엄청나게 고급이거나 까다로운 인간들한테는 못 미치는 맛이겠지만. 커피가 내려오는 27초 동안 전 직장에서 만난 머리가 길고 수염을 아무렇게나 기른 매니저님을 떠올렸다. 커피를 좋아한다는 내 말에 "그럼 커피도 잘 알겠네요? 뭐 좋아해요?"라는 말에 "산미있는 원두 좋아해요." 했던 대화. 짧지만 일이 아니라 내 사적인 취향에 대해 질문한 그가 잠깐 떠올랐다.
윙, 하고 물이 도는 소리가 멈추고 커피가 다 내려왔다. 두 개의 샷잔에는 크레마가 얇게 올라간 샷이 두 개 일정하게 나와있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샷이 다 내려온 순간에 크레마가 흩어지지 않게 잔에 부어놓아야 했는데 카페에서 일하다 보면 좋은 타이밍을 놓쳐 항상 대충 때려붓기 일쑤다. 커피 맛은 크레마가 좌우한다! 던 노원역 카페의 어떤 사장님의 말이 생각났다.
정적인 일터에서만 하루하루 버티며 근무하던 날들도 나쁘지는 않았으나 1년이 가까워오자 질렸던 것도 사실이라, 바쁘더라도 지금 살아가는 것이 이전보다는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이 덜 깬 채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나쁘지 않네. 오늘의 감상. 나쁘지 않은 거 같다.
폭염주의보. 외출을 자제하라는 말이 담긴 재난문자는 크게 와닿지 않았으나 그래 덥긴 덥더라, 정도의 감상으로 남았다. 나는 이런 걸 보면 사람은 꽤나 단단하게 잘 만들어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만약에 인간이 젤리같은 반고체로 존재한다면 이 정도 폭염에는 주르륵 녹아서 주스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주스가 되어버리면 아마 컵에 담기거나.. 인간형 슈트에 담겨서 찰랑찰랑 생활하겠지. 생각해보면 이것도 재밌을 것 같기는 하다. 젤리 인간.
퇴근길은 얼마를 일하던 즐겁다. 퇴근하며 생각했다. 이제 생체 리듬이 좀 잡혀가는 중이니, 글을 미루지 말아야겠다. 더 이상 시간이 없다고 미루기에는 핑계인 듯 하니까. 하루 한 번. 길이에 상관 없이 기록하는 일. 아무 말 대잔치여도 언젠가 돌아보면 재밌는 기록들이 되겠지. 꼭 그 날 있었던 일이 아니더라도. 네 시간 반을 채우고 집에 가는 길에 오늘은 가다가 젤리를 사 먹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백도가 들어있는 달큰한 젤리. 젤리 인간 생각을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덜 깬 채로 커피를 마셔서 그런 걸까.
젤리 하나에도 고민을 붙이는 내가 질려서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천 삼 백원 짜리 행복을 사 먹었다. 적당히 미지근한 달달함이 좋았다. 젤리를 먹는 짧은 시간 동안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아직 커피보단 한창 달달한 게 좋을 나이니까. 한참 멈춰두고 읽지 않던 책도 폈다.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기분이 들었다. 피곤하지만 달달하게 살아가기. 아니면, 뭐. 그냥 코딱지나 파면서 오늘을 살아가지 뭐.
20200817
시작, 하루하나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