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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Aug 24. 2020

불쑥 찾아온 손님

그리고 내 오래된 불편함에 대해 

 이른 오후, 기름진 원두 냄새 속에서 포스기를 톡톡 두드리고 있던 중에 문이 열렸다.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어서오세요 하고 앞을 보니 조금 남다른 손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 분은 한참 더운 날씨임에도 약간 두께감이 있는 자켓까지 말끔하게 차려입고 반 백발의 머리카락을 뒤로 깔끔히 빗어 넘겨 묶은 채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노골적인 시선이 약간 부담스러웠고, 다음으로는 말쑥한 차림새보다 턱까지 내려쓴 마스크가 신경쓰였다. 카운터에서 세 발짝 즈음 떨어져서 나를 쳐다보는 눈, 쓸어넘긴 백발 창백한 안색에 대비되는 꽃분홍색 립스틱이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다. 숨을 한번 고르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자신이 한 팔 가득 들고온 책자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각장애인 작곡가인 아들, 그리고 자신은 그 아들의 어머니라고 소개하며 이야기한 것은 결국 '미국으로 유학을 가야 하는데 경비가 모자라다.'는 이야기. 책자 하나 당 13,000원이니, 조금이라도 주셔도 괜찮으니 사달라는 이야기. 고급스럽게 포장한 이야기였지만 결국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는 '돈 좀 보태주세요.' 였다. 나는 그의 가슴에 달린 명찰을 유심히 살폈다. 직접 인쇄한 것 같은 작은 종이에는 "ooo어머니 oooo"라고 써있었다. 


 나는 일상에서 유독 이런 상황을 종종 마주치는 편인데, 실제로 내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그것을 몽땅 주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적당히 거절하는 법을 몰랐을 때, 그리고 내게 뭔가를 원하는 사람들의 말이 다 진실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말이다. 

 한 번은 인천행 1호선에서 마주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덥수룩한 머리에 작은 대부업체 메모지 위에 삐뚤게 갈겨쓴 종이를 사람들 무릎마다 놓아주고 있었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지나 메모지에 뭐라고 써 있는 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한적한 평일 열한시의 인천행 열차에서 내 무릎 위에 떨어진 종이는 아무래도 마음에 큰 파도를 일으켰던 것 같다. 감동이었는지 슬픔이었는지, 아니면 동정이었을 지는 모르겠지만. 학생일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갑에 있던 지폐와 동전을 탈탈 털어 그에게 건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이 빨개진 채로. 

 내 인천행 지하철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너는 너무 착하다, 고 이야기하지만 실은 아니다. 내 오래된 불편함은 그것이다. 나는 착하지 않고, 오히려 바보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내 이야기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착하다'고 이야기하는 것. 


 예전에, 아주 어릴 때는 모두에게 착하고 좋은 사람이고 싶어 안 보이는 곳에서도 애쓰며 살았었는데 그것이 피곤해진 지금은 하루하루 평범하게 살기를 기도하며 버틴다. 이렇게 살다 보니 착하게 사는 것이 미련하게 사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만약 내 지갑에 돈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었더라면 그에게 돈을 쥐어 보냈을 것이다. 그 돈이 아들이 정말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길에 쓰일 지 아닐 지 모르지만. 그래도. 


 미련하게 살아왔던 지난날의 내 모습을 후회하지 않지만, 앞으로는 적당히 거절하는 법에 대해서도 더 배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미련하면서 착하게 사는 것 보다 적당히 내 것을 지키면서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으면서 살아야 내가 편안할 테니까. 뭐든지 적당한 게 좋은 법이니까. 너무 과하지 않게 친절하게 거절하는 법에 대해 계속 곱씹으면서. 


 오늘 가게를 찾았던 백발의 여자분은 죄송하지만 저희가 영업 중이라서, 죄송합니다. 하는 말을 건네자 마자 돌아갔다. 가벼운 목례와 함께.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송하다는 말을 되뇌었다. 적당히 거절하며 살자고 생각해도, 여전히 거절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라는 걸 한번 더 생각했다. 


2020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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