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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Sep 02. 2020

오래 두지 마세요

전자제품도 마음도 

 재이와 통화를 하다보면 종종 재밌는 순간이 생긴다. 재이와 나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요즘은 종종 화상통화로 술자리를 갖곤 한다. 우스갯소리를 덧붙이자면, 재이와 나는 코로나가 이토록 창궐하기 이전부터 화상 술자리를 했으니, 우리는 어떤 문화의 선구자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오늘도 다름없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재이와 이야기하며 화상 술자리를 진행하던 중에, 전에 내가 건네줬던 전자담배를 재이가 꺼냈다. 나름대로 입에 맞았던 모양이다. 원래는 연초도 자주 피우지 않는 친구인데. 재이는 한번 입에 물고 빨더니, 액상이 젤리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하기야 피우지 않던 걸 가져가서 피우려니 뭔가 문제가 있었겠지. 


 재이와에 대화에서 우연히 지난 친구의 고민이 떠올랐다. 연인에게 불만이 생겨도 바로바로 말하지 못하겠다던 그 친구. 그리고 친구는 내게 고민을 털어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인과 헤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생각하던 고민을 남자친구가 똑같이 겪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연애를 하며 비슷한 실수를 저지른다. 이 정도는 어쩔 수 없지, 괜찮지 않지 하는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서로 간의 가벼운 균열을 만든다. 이 정도는 괜찮지, 라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근데 이래도 되나? 하는 마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야기를 꺼내기까지의 순간이 어려운 거지. 

 꼭 어떤 불만이나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면 불쑥 이런 마음이 든다. 이 이야기, 해도 되나? 우리 이런 말 해도 되는 사이인가? 연애를 하며 쌓아온 유대감이 확실한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드는 의심이다. 

 그렇게 하나 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어 의심이 쌓이게 되면 우리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는 하는데, 이 과정에서 마음이 상한다. 마음이 상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빠르고 유형의 무언가가 없어서, 우리는 스스로가 괜찮다고 착각한다. 괜찮은 거 같아. 나 괜찮아. 이 정도는 괜찮아. 하고. 


 그런데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 않다. 머리로는 괜찮다고 이해한다고 이야기해도. 괜찮지 않은 일들이 존재한다. 머리는 그럴 지 몰라도 마음은 괜찮지 않다.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오래 감싸둔 내 마음은, 적어도 나를 위해서는 괜찮지 않은 일로 전락한다. 

 깨닫는 순간은 느릿하고 그 과정에서 마음이 상하는 것 또한 그렇다. 


 재이는 전자담배 액상을 다시 흔들며 근데 액상은 아직 괜찮아, 넣어둔 건 좀 굳었는데. 하고 이야기했다. 나는 재이의 말을 듣고 그렇지. 그래서 오래 두면 안 돼. 뭐든. 사람 마음도 그렇잖아. 오래 두면 안 돼. 형태가 변해 버리니까. 하고 대답했다. 


 재이가 취하는 바람에 오늘의 술자리는 끝났지만, 나는 남은 소주 한 잔을 홀짝 들이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만약, 전에 마음을 오래 머무르게 두지 않았더라면 하고. 이제 와 생각해봐야 의미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앞으로는. 버릴 것은 미리 버리고, 간직할 것은 반드시 간직하고. 오래 두지 말 것. 


20200902

오래 두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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