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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May 03. 2021

어쩌다 파주(1)

S와의 첫 자동차 여행. 운전담당 S, 칭찬담당 디디.

 S와 여행을 가기로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우리의 아주 지난 생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엄청난 실용주의자들이지만 왠지 낭만도 챙겨야되는 우리는 서로 어떤 선물을 해줄지에 대해 거진 2주동안 이야기만 했다. 정말 이야기만. 그러다 보니까 서로 갖고싶지만 상대한테 사달라고 하기에는 이상하거나 애매한 것들만 잔뜩 늘어놓았고, 결국 '서로 선물하는 대신 같이 여행을 가자.'라는 이상하고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상하지만 합리적이다. 햇수로 이제 4년쯤 되어가는 우리 사이에 한 번도 둘이서 함께 외박을 하거나 여행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S와 나는 서로 여행을 가기로 정해지자마자 서로 극명하게 다른 행동양상을 보였다. S는 평소에도 목적지만 정해두고 그때그때 찾아서 여행하는 타입이고, 나는 그 전날까지 모든 계획을 세워서 어떻게 가면 좋을지, 동선이 어떤지를 찾아보는 편이니까. 원래 목적지는 바다를 보기 위해 양양이나 속초로 갈 예정이었는데, 따듯해진 날씨의 여파로 그 근처 바다가 보이는 예쁜 숙소 몇 개는 이미 우리가 가기로 한 날짜에 거의 매진이었다. 첫 단계부터 난관에 봉착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의논했다. 우리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갈까'이기도 했지만 '좋은 숙소' 이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장소를 속초로 특정하지 않고 좋은 숙소를 찾아 에어비앤비부터 숙박 예약 어플을 전부 뒤졌다. 그리고 회사에서 일정과 대부분의 모든 걸 확인해야하는 S를 위해 업무용 메일처럼 꾸며서 전송했다. 


 숙소를 정하고 나서 우리의 일정은 착착 진행됐다. 사실 예약과 계획을 정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는 했으나, 나는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계획대로 되면 물론 더 좋지만 인생이 어떻게 계획대로만 될 것인가. 목적지와 숙소 두 가지가 정해졌고, 대강 가고싶은 곳들을 꼽았다. 동선낭비를 하고 싶지 않아 동선을 찾아보겠다고 했지만 S는 그마저도 여행의 묘미가 될 수 있다며 나를 말렸다. S의 말이 맞다. 나는 근래 받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었고, 그것 때문에 마음이 시끄럽게 요동치기가 몇 번. 여행에서마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모처럼 S와 처음으로 함께 가는 여행이기도 하니까. 파주를 가기로 했다.


 파주로 향하기로 한 우리의 첫 일정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 거였다. 이 여행에서 내가 가장 기대한 순서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맛집을 찾았었는데, 아쉽게도 그 맛집은 말 그대로 파주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익히 알려진 곳이라 웨이팅을 하게 되면 30분 이상 대기해야 했다. S와 나는 여행을 오면서 다짐한 게 있는데, 너무 긴 시간은 기다리지 말자는 것. 30분이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S와 나는 오는 내내 너무 배가 고픈 상태였기에 웨이팅은 안 하기로 했다. 다음에 다시 오면 돼. 그치. 그리고 오다 발견한 주변의 초밥집에 들어갔다. 초밥집에서는 S에게 딱 한 끼 정도는 사주고 싶은 마음에 내가 선뜻 계산했는데 S는 내가 계산하는걸 바들바들 말리다가 결국 그럼 이번 한 번만 내가 계산하라며 입을 댓발 내밀었다. 

 근래 S는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부터 내가 계산하는 일이 없게 만든다. 언젠가 제대로 월급빵을 쏘겠다며 벼르고 있기도 하다. 웃긴 일이다. 내가 우스갯소리로 야 니가 내 전 애인들보다 낫다, 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이제 누구 만날 생각이면 적어도 자기보단 나은 사람을 만나라며 역정을 냈다. 내가 그 말에 너보다 나은 사람이 있으면 큰일 난다. 결혼 해야돼. 하고 대답했다. 

 분명 초밥 사진을 찍었던 것 같은데 초밥 사진이 없다. 어쨌든 맛있는 식사였다. 갑자기 들어온 곳 치고 괜찮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파주 지혜의 숲, 승정원일기를 읽는 S의 뒷모습.

 우리는 둘 다 책을 좋아한다. 문제는 장르가 너무 다르다는 거지만. S는 역사, 세계사, 뇌 과학, 철학 같은 장르의 책을 좋아하고 나는 현대 소설, 근대 소설 등 소설을 좋아한다. 공통점은 둘다 어줍잖은 에세이는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이 많은 곳을 한 번 가기로 했다. 파주에는 유명한 지혜의 숲이 있으니까. 

 지혜의 숲은 말 그대로 웅장한 도서관같은 곳이었다. 거기서는 북스테이를 하는 게스트하우스도 볼 수 있었는데, 미리 알았더라면 여기서 묵을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나와 S의 견해는 비슷했다. 북스테이는 혼자서 가야 한다는 것. 혼자 가서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고, 좋아하는 문장을 다시 종이에 적어보는 그런 하루. 우리는 각자 뭔가를 사려고 하다가 사지 않았다. 꼭 여기서만 살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는데, 꼭 그런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멀리의 사진을 찍는 디디. 

 그래도 지혜의 숲 건물에 꽤나 오래 있었다. 좋았다. 커다란 공간 옆에 강이 흐르는 것도 좋았고, 버드나무가 흐드러지게 가지를 내려놓고 서 있는 것도 운치있어 좋았다. 공간이 시원하고 커다랗고 높았다. 높은 것이 무서워서 그늘 밖으로 걸어 나가기는 좀 무서웠다. 그래도 탁 트인 풍경이 좋아 계속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나는 여태 바다가 좋아서 바다가 없는 곳으로는 여행지도 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파도소리나 바다가 없고 짠내가 나지 않는 여행지도 좋았다. 서울 근교에도 이런 곳이 있어 좋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지혜의 숲에서 나와 카페로 향했다. 밥 먹은 것이 좀 가라앉았으니 빵도 먹고 커피도 마시자고. S와 함께할수록 이런 여행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은 S가 다 했지만. 우리는 차에 타면 계속해서 야 어쩌다 우리가 같이 여행을 왔느냐, 어쩌다 벌써 S가 차를 운전해서 여행을 올 나이가 다 됐느냐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러게, 그러게 하면서 맞장구 치다가도 내가 나는 아직 어린데? 하고 얘기하면 S가 발끈하는 식의 대화였다. 

 우리는 아직도 종종 신기하다. 두 살 터울에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인연이 벌써 햇수로 3년 째다. 나는 우리가 처음 봤을 때의 S나이를 넘겼고, S도 그만큼 같이 차곡차곡 시간을 쌓았다. 햇수로 3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 만나기만 해도 재밌고 전화통화를 시작하면 두 시간이 기본이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여행 밤 하이라이트였던 술자리에서는 정말 이것저것 할 말이 끊기지 않아 S가 지쳐 잠들때까지 우리는 둘이 떠들었다. 

S가 찍은 카페 다리 위 디디. 카페가 엄청 컸다. 
이 날의 베스트. 너무 맛있었다. 
다정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두 줄 정도 읽다가 일어났다. 

카페에서 에너지 소모 후 급 피곤해진 우리는 장을 본 후 숙소로 가기로 결정했다. 숙소로 가는 게 우리 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2021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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