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디 May 23. 2022

그 시절의 꿈에 대해

엄마, 엄마는 꿈이 뭐야? 

 이십 오 년을 살면서 내가 엄마에게 가장 많이 이야기한 것 중 하나는 "나는 내가 하고싶은 거 하면서 살 거야!"였다. 그냥 20대의 패기나 고집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선언처럼 이야기하곤 했다. 엄마, 나는 하고싶은 게 있어. 그걸 꼭 해낼 거야. 엄마도 처음에는 글 쓰고 싶다면서, 그걸로 얼마나 벌어먹고 살고 싶어서? 글 쓰는 거 돈 잘 안돼. 알잖아. 하고 이야기했지만 점차 하나씩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래 인생 한 번 사는거 너 하고 싶은 거 좀 하면 어떠냐. 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방에 틀어박혀 365일 8시간동안 글만 쓰는 것이 아니라 글도 쓰고,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언젠가 글로 벌어먹고 살겠다는 내 꿈을 엄마는 여전히 지지해준다. 최근에는 내가 쓴 글을 읽어 보시기도 했다. 그냥 슬픈 이야기네. 하고 말았지만 엄마에게 내 글을 보여주고 감상을 듣는 것이 묘하고 감동적이었다. 누구보다 보지 않기를 바랐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었으니. 


 엄마, 엄마는 꿈이 뭐였어? 


 나는 종종 엄마와 함께 보내는 나른한 오후에 이런 질문을 하곤 했다. 엄마가 회사를 다니던 시절에. 엄마가 아니라 박여사, 그러니까 박 양이라고 표현해 이야기해 보자면, 박 양의 인생은 꽤 다이나믹하고 기구하다면 기구하다. 엄마에게 이런 표현을 써도 좋을 지는 모르겠지만. 안 된다면 뭐. 박 양에게 양해를 구하기로 하고. 


 박 양은 74년생으로 나와는 25살 차이가 난다. 이 말인 즉슨 박 양은 25살에 나를 낳았다는 것. 스물 다섯에 누군가의 부인이 되고 첫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지금으로 보면 빠른 것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리 이른 것도 아니었다. 물론 문제는 상대방이 아홉 살이나 많은 우리 아빠였다는 거지만. 박 양의 결혼생활은 평범했다. 박 양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작은 회사를 다니다가 김 군과 결혼했다. 아홉 살이 많은 같은 회사 상사와. 다행히 서로를 아주 사랑해서 선택한 연애 결혼이었다. 박 양이 김군을 처음으로 집에 데려가 인사시켰을 적에 집안 어른들이 길길이 반대를 했다고. 내가 박 양의 가족이었더라도 반대했을 것이다. 아홉 살 많은 노총각에, 삼대독자만큼 예쁨받고 자란 장남이라니. 봐줄 만한 거라고는 멀끔한 생김새와 이제 막 자리잡기 시작한 직장. 그러나 사랑이라는 게 언제나 그렇듯 둘은 평범한 역경을 이겨내고 결혼했고, 결혼한 지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내가 생겼다. 박 양에게 태몽은 뭘 꾸었냐고 물었지만 박 양은 솔직히 첫 출산이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꿨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 스물 다섯에 낳은 첫 아기는 너무 조그마해서 안으면 부서질까 무서웠다고도 했다. 그래도 박 양은 나를 낳는 순간은 솔직히 힘들고 죽고 싶었지만 낳아놓은 것이 꼬물꼬물 움직여서 뭐라도 해 보겠다 숨을 쉬는 것을 보고는 앞으로는 이 아이를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박 양의 직장생활은 결혼 그리고 임신과 동시에 끝났다. 평범한 경력단절의 순간. 박 양은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더라도 그리 슬픈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2년이 지나 둘째 아이를 낳고, 4년 후에 또 막둥이를 낳는다. 그리고 불편한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셋째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군이 앓기 시작했다. 당시의 신파소설도 이 정도로 비극적으로 서술하지 않았으리라. 김군은 말기 암이라고 했다. 위암 말기. 

 그래서 이 신파극의 끝이 어땠느냐면, 이제 갓 태어나 걷지도 못하는 두 살짜리 막둥이와 이제 막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된 여섯 살 둘째,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나를 두고 김군은 그대로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 때 박양의 나이가 서른 둘이었다. 박양은 어땠을지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유쾌한 시기가 아니었음은 확신한다. 나는 아빠가 아프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첫째의 무게를 짊어지기에는 어렸고 암이 뭔지는 알아도 죽음이 뭔지는 가늠하기가 어려웠기에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였다. 아빠는 멀리멀리 갔고, 그래서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죽음이고 이별이라는 것을 깨닫는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박 양은 김군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추스를 시간도 없이 일을 시작했다. 식구들의 도움을 받아 작은 회사에 취업했고 꾸준히 그 일만 했다. 간단한 사무작업과 클라이언트 응대. 내가 알기로는. 아홉 시에 일을 나가 여섯 시면 집에 돌아왔고, 그 긴 시간 동안 갓난쟁이에 가까운 막내를 혼자 둘 수 없어 친가와 외가를 전전하며 아이들을 맡겼다. 그러다가 김군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게는 할아버지인 사람이 엄마에게 애들 두고 네 삶 찾아라. 하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전해 들은 얘기지만. 박양은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했다. 내 배 아파 낳아놓고 모르는 척 살아갈 수는 없다고. 그냥 키우겠다고. 이 얘길 처음 들었을 때 엄마 대체 무슨 용기로 그런 말을 했어? 하고 물었고 엄마는 몰라. 그냥. 내 새끼들인데 어떻게 다 버리고 가.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몇 년간 엄마는 같은 일을 했다. 가끔은 그만뒀다. 그만두고 미용을 배우겠다고 미용실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나 일찍이 상한 손목으로 반복적인 작업을 하다 보니 손목 통증이 점점 심각해져 미용도 일 년을 조금 넘게 하다가 그만두었다. 원래 미용사가 꿈이야 엄마? 하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라고 했다. 손재주도 좋다는 말을 듣고, 머리 만지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던 터라 시도해 본 거라고. 그리고 전문직이니 다른 것 보다는 익숙해지면 평생 일해도 괜찮지 않겠나 싶어 해본 것이라고. 

 미용은 얼마 못 가 건강이 좋지 않아 그만두게 됐고, 엄마는 보험 설계사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덕분에 보험 몇 개를 가입해야 했지만 엄마는 일을 열심히 하기 위해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교재도 열심히 공부하며 설계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러나 그 자체는 얼마 가지 않았다. 설계사 자격증이 있든 없든, 회사에서 엄마의 위치는 '보험 신규 가입자를 데려와야 하는' 위치에 지나지 않았고 숫기도 말주변도 없던 엄마는 금새 일을 그만 두었다. 많은 일들에 회의감을 느끼고 떨떠름해 하던 와중에 계속해서 일 하던 회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벌이가 힘들면 다시 일해보겠느냐고. 그렇게 일한 지가 햇수로만 5년은 훌쩍 넘었을 즈음, 엄마가 돌연 선언했다. 


엄마 하고싶은 게 있어. 


 코로나로 고용난이 심각해진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 이력서를 뿌리고 다니던 나는 제법 연봉을 주는 직장에 들어가게 되었고, 집과도 가까워 왠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그만두지 않을 심산이었기에 선뜻 하라고 제안했다. 그게 엄마 꿈이야? 하고 물으니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업을 하겠다거나 가게를 내 달라거나 하는 거창한 것도 아니었고, 간호조무사 공부를 해 보고 싶다고 했다. 정년도 괜찮고, 엄마도 꼭 공부해보고 싶은 분야였다고. 엄마가 간호 관련 과를 졸업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대신 일 년 정도는 공부만 해야 해. 괜찮아? 


묻는 말에 선뜻 괜찮다고 했다. 엄마가 하고싶은 걸 해 보라고. 내가 다 자라서 5개 넘는 일자리를 전전할 때도 아무 말이 없던 엄마가 이제는 정말 하고싶은 게 있어서 노력해 본다는데. 꿈 꿀 시간 없이 살아온 사람이 이제는 꿈을 좀 이뤄내고 싶다는데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자식이더라도 말릴 권리는 없는 것이지. 그리고 애초에 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는 아빠가 일찍 세상을 떠난 걸 제외하고는 아주 평범한 가정이다. 누군가는 동정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어려워 하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는 이것으로 차별하기도 하지만 애써 말하지는 않겠다. 저열하고 치사하게 구는 사람들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은 까닭이기도 하고, 내가 가진 결점이 사회적으로 받는 혜택들도 있기 때문이다. 결점이라고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다지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 결점까지는 아니기에. 다만 내가 바쁘게 살아오는 걸 핑계로 엄마의 꿈을 돌아보지 못한 점이 가끔은 미안하게도 느껴졌다. 엄마, 엄마도 하고싶은 게 있었을텐데. 

 요즘 엄마는 평범하게 푸념한다. 간호조무 실습을 나가기 시작했는데, 남들의 아픈 점을 보고 환자들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단편적으로 비위가 상하는 순간도 있으니까. 엄마의 푸념들을 듣다가 가끔 묻는다. 엄마 그래서 어때? 힘든 거 말고. 해보니까 재밌어? 엄마는 좀 생각하다가 재미 없어! 하고 까르르 웃는다. 엄마가 이전에 하던 일보단 지금이 좀 행복해 보인다고 이야기하면 엄마는 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건강해 보인다, 엄마. 하고 이야기하면 엄만 다시 배시시 웃고 만다. 


 엄마의 삶이 어제보다는 조금 행복했으면 좋겠다. 일확천금에 당첨되는 행운과 행복을 바라지 않으니까. 소소하게 행복한 일들이 생겼으면 좋겠다. 어제보단 오늘이 좀 더 수월하고 오늘보단 내일이 좀 더 즐거운 행복. 엄마가 여태 나의 삶과 꿈을 응원해주고 지켜봐주던 만큼. 엄마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20220523

엄만 꿈이 뭐야? 

매거진의 이전글 꿈이라는 건 내게 껍데기만 화려한 사탕껍질 같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