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없어도 괜찮은 세상을 살고 싶다는 글을 봤어요. 술 마신 새벽에.
꿈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다. 꿈을 꿔야만 한다는 생각에 숨이 막히던 날들이 있었다. 꿈을 이루면 행복해질 거고, 그럼 나의 인생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수 있을 거고. 그러나 현실은 최저시급 8740원(2021년 기준) 짜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다음 달 핸드폰 비는 어떻게 내지? 하고 살아갈 뿐이니까. 꿈이라는 건 10일에 나가야 되는 교통비처럼 월에 한 번씩 분할해서 낼 수는 없는 것이라, 평생을 꿈을 꾸고 이뤄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무거웠다. 그냥 무던하게 살아가는 건 안될까요?
극단에서 잠깐 일을 돕던 때가 생각났다. 지금처럼 변함없이 일을 하면서 극단 일도 도우면서, 학교도 알아보는 중이었기에 내 인생에 그보다 바쁜 시기는 없었더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극단 일은 K의 추천을 통해 시작하게 됐다. K가 자신의 극단에서 작가 보조를 구하고 있다고 언질을 주었고,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K가 있는 극단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어 함께 식사를 하게 됐다. 말이 식사고 소개였지, 사실은 예술한다는 사람들끼리 술이나 한잔 하자! 하는 느낌이었기는 하지만.
극단의 연출을 맡고 있다는 P와 가장 먼저 인사를 나눴다. P는 겉보기에는 작은 체구에 뚜렷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가진 상반되는 점들이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예를 들어 짙은 눈썹 밑에 얇은 콧대와 듬성듬성 자라 있는 수염, 고집스럽게 쭉 뻗은 진한 눈썹 같은 것들. 그는 거리낌 없이 악수를 청했다. 사실 첫 회사에서 부장과 한 악수가 마지막이었던 탓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P는 아니 이 친구 악수를 재밌게 하네! 하고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수유역 근처의 맥주집에서 모여 인사를 나누고 술을 한두 잔 함께 마시기 시작했다. P는 보이는 것처럼 자신이 하는 연극 분야에서 고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건 몇 안되던 P의 연출 작품들만 쭉 훑어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기는 했다. P는 내게 누구도 하지 않았던 질문을 했다.
어떤 글이 쓰고 싶어?
한참을 망설였다. 그냥 글이 쓰고 싶었지, 무엇을 쓰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그때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글쎄요. 하고 싱겁게 대답하자 P는 그러면 안 된다며 탕, 하고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죄인이 된 기분으로 눈만 꿈뻑였다. 왜 그러면 안 되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괜히 잘못한 기분에 입을 꾹 닫고 눈만 끔뻑, 끔뻑. P는 응당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목표가 있어야 하고, 언제나 쓰고 싶은 게 있어야 된다며 열정적인 언사를 토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나는 덕분에 내 삶과 습관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경험을 하고야 말았다. 스스로 글에 대한 비판과 생각을 거치게 된 것도 아마 그즈음이었으리라. 내가 쓰고 있는 글에 목적의식이 있는 걸까? 내가 쓰는 글이 옳은 글일까?
P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나중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 P는 K에게 이미 내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함께 일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고- 자신의 극단에서 같이 도와줄 수 있겠느냐 물었다. 솔직히 페이는 챙겨주기 힘들 거지만, 그래도 경험이라 생각해보겠느냐고. 스무 살 초반의 ‘작가’라는 칭호를 꿈꾸던 글쟁이에게 딱 어울리는 유혹이었다.
당장 시작하는 극부터 함께 하자는 말에 같이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을 하는 동안 극을 쓰는 것보다 자료를 찾는 시간이 더 길었고, 회의 내용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시간이 더 길었으며 터무니없는 무대 보조를 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연습에 참여해 의견을 피력하라는 말을 들었으나 의견을 피력하기에 스물 하나의 나는 소심했고, 미움받을 용기를 내기엔 어렸다. 겉으로는 나이가 든 척 이제는 성숙한 척했으나 아무리 애써보아도 스물 하나였을 뿐이니까. 그리고 때때로 피력한 나의 의견은 받아들여지기 전에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지난 오해와 와해가 맞물린 회상일 수도 있겠다. 지금은 이미 삼 년이 넘게 지난 일이니까.
작업을 하는 동안 이런 기분 나쁜 일들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분명 연극이라는 잘 모르는 세계에 대해 배우고, 사람들 사이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한층 더 이해했다. 하나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고,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주사를 부리지 않는 법에 대해서도 조금은 터득했다. 싫은 사람이 주는 술을 에둘러 거절하는 방법도. 또 희곡의 기초와 소설과의 차이점 같은 것들도. 꿈을 향한 한 걸음이라고 생각하며 견뎌냈지만 그것에 비해서는 그리 값진 것들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물론 삼 년이 지난 이제야 드는 생각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점보다는 억울하고 괘씸한 점이 더 많은 경험이지만 P가 물었던 말이 내 삶에 큰 파장을 일으켜 두었다. 아직까지도. 어떤 글이 쓰고 싶어? 문제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것. 삼 년이나 지났고, 여전히 글을 적고는 있지만 뭘 쓰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P와 세 개 정도 같이 작업했던 영의 말이 떠오른다. 시간이 지나면 미친 듯이 쓰고 싶은 게 생겨. 나는 그런 게 있으면 글을 써.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그때의 영에게는 저도 그래요. 하고 맞장구쳤지만 솔직하게 전달하고 싶은 것은, 난 아직까지 그랬던 적은 없다. 적당히 쓰고 싶은 것이 있어 적당히 글을 쓰고 잠을 거르는 법이 없고, 커피는 하루에 한 잔으로 족한. 지극히 평범하고 무난한 나.
무엇을 적고 싶지 여전히 모르지만 여전히 적고 있고, 쌓이고 있다고 느낀다. 많은 경험과 다양한 순간을 바탕으로. 사실 있고 없고 하는 것들은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닐까. 계속해서 내가 뭘 적고 싶은 지 잘 모르지만 적는 것처럼. 뭔들 꾸준히 하나를 파고들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이 생기고 이루고픈 순간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꾸준히 열심히지만.
완전히 잊어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내가 뭘 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그럼 뭘 하든 하고 싶었던 걸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테니까. 설령 이뤄내는 실체가 없을지라도.
여전히 꿈꾸는 것이 있고, 나는 여전히 글을 쓴다. 언젠가 나를 포장하기 위해 제 꿈은 등단을 하는 것이고, 저의 꿈은 작가입니다. 하고 말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내가 뭘 하든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 것이 전부 만족스럽다. 더 이상은 포장하기 위한 꿈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해 생각하는 것들을 이루게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무던하고 심심하게. 큰 기적 없이. 꾸준히.
20220115
눈이 내린대요. 서울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