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와인이 어울릴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조화로움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나와 어울리는 색깔, 어울리는 스타일, 더불어 그 모든 것들에 어울리는 악세사리나 나의 태도. 나와 어울리는 공간. 그런 조화로움들이 모여 하나의 인격이 되고 습관으로 남기도 하는 것들을 몇 번이고 마주친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한 끼 식사에서도 서로 '어울리는' 것을 먹고 싶어하는 것이다. 가벼운 패스트푸드점에서 식사를 할 때 우리가 당연하게 탄산음료를 주로 함께 먹는 것 처럼. 특히 좋은 날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간에서는 덕분에 '어울리는 걸로 추천해주세요.'하는 말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녁은 레스토랑이라는 특성 상 런치보다는 디너에 항상 붐비는 편인데 디너에는 꼭 한 번씩은 듣는 말이 있다.
어떤 와인이 어울릴까요?
하는 말. 많은 사람들이 어울리는 와인을 물어본다. 그제까지만 해도 와인을 추천해주는 일은 내 업무는 아니었지만, 하나 둘 테이스팅을 거치며 경험을 쌓고 있는 중이다. 덕분에 이제 주문한 메뉴에 따라 화이트가 어울릴지 레드가 어울릴지 정도는 추천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 보통 테이블에 따라 추천하는 가격대가 다르기도 하지만, 이 부분은 내가 아직까지는 파악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대표님은 이런 부분을 잘 캐치하는 분인데 역시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갈고닦은 경험은 이길 수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와인을 추천해달라고 이야기하는 고객들이 콕 집어서 "저는 레드와인을 추천해주세요."하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보통 추천해달라는 것은 '내가 고른 메뉴와 잘 어우러질 수 있는 것을 추천해달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다 잘 알다시피 화이트와인은 치즈, 해산물 등이 들어간 요리와 잘 어우러지고 레드와인은 고기, 버섯이 들어간 요리와 잘 어울린다. 녁의 음식은 주로 크림, 치즈, 해산물이 들어간 경우가 많으니 사실 화이트와인을 추천하면 반은 먹고 들어가는 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이것도 테이블 상황에 따라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유독 와인을 추천해달라는 분들이 많던 날이었다. 홀은 이미 만석이었고 주문을 하는 테이블마다 와인을 추천해달라고 하니, 그 때마다 대표님을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우스와인 두 가지 중에 추천이 가능한 테이블도 있었고 그 외에 다른 걸 추천해달라고 이야기하는 테이블도 있었다. 그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테이블이 있는데 바로 내가 인생 첫 레드와인을 오픈한 테이블이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네 명의 고객님이 있었고, 특별한 날인 듯 뭔가를 기념하는 것 같은 모임이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테이블에 추가로 주문한 몬테풀치아노 한 병을 손에 꼭 쥐고 끼어들었다. 실례합니다. 말 한 마디에 쏠리는 시선에 와인 오픈은 시작하지도 않았음에도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와인에 대해 짧게 설명을 마치고 추가로 주문하신 와인 오픈 해드리겠습니다. 하고는 와인 윗부분의 포장을 잡아뽑은 후 양해를 구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오늘 인생 처음 와인 오픈이라, 조금 느릴 수 있습니다. 최대한 빠르고 자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고 약간 웃으며 이야기하자 다들 손사래를 쳤다.
괜찮으니 천천히 하셔도 돼요!
약간 취기가 오른 테이블에서 까르르 웃음 소리가 곳곳에서 터졌다. 괜시리 오픈에는 자신도 없는 나도 들떴다. 천천히 하라는 말이 일하는 사람인 내겐 얼마나 큰 위로가 됐는지. 조금 버벅이던 순간에도 긴장한 걸 알았는지, 저희 다른 곳 볼까요? 하고 내게서 애써 시선을 돌리려던 배려에도 약간 감동했다. 물론 구석에 앉아 계시던 안경을 낀 고객님은 나를 조마조마하게 계속해서 지켜봐 주셨다. 그러나 실수하지 말자, 보다는 천천히 조급해하지 말자고 노선을 튼 나에게는 격려같은 시선이었다. 소리없는 화이팅.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약 삼 분 정도 후에 와인이 오픈됐을 때 테이블에서 조용히 박수를 쳐 주셨다. 너무 잘 하시는데요! 하는 말과 함께. 고작 와인 하나를 오픈했을 뿐인데 어깨가 으쓱했다. 너무 으쓱하는 바람에 코르크 마개를 두고 오는 것을 깜빡하고 주머니에 쓰레기들과 함께 넣어온 것만 제외하면.
그날의 와인 오픈은 성공적이었고 네 분의 와인 오픈을 스타트로 다른 테이블에서도 와인을 바틀로 주문하면 내가 오픈을 나갔다. 두 번째의 테이블에서도 비슷하게 와인을 소개하고 내 사정에 대해 잠깐의 양해를 구했다. 제가 오늘이 인생 두 번째 와인 오픈입니다. 여자 두 분은 까르르 웃으시면서 그런데 너무 잘 하시는 거 같아요. 익숙하게 잘 하시는데요. 하고 나를 격려했다. 덕분에 사적인 대화도 조금 나눴다. 서비스업에서는 주로 이렇게 고객과 하는 짧은 소통을 '스몰토크'라고 하는데 여자 두 분이 계셨던 테이블에서는 꽤 긴 스몰토크를 나눴다. 와인을 평소에 좋아하시나요? 하는 내 말에 좋아하긴 하는데, 많이 접하지는 못한다고 대답하셨다. 사실 저도 마찬가지에요. 저도 여기 와서 와인을 조금씩 공부하고 있답니다. 내 말에 맞장구를 치며 평소에는 와인 먹기 힘드니까요. 혹시 그럼 와인 말고 다른 술은 좋아하세요? 하고 물으셔서 사실 저는 맥주를 좋아해요. 하고 대답했다.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면서 사실 저희도 맥주를 더 좋아해요 대답하시는 두 분의 표정이 와인을 좋아하냐는 질문을 했을 때와는 또 사뭇 다르게 상기되어 있었던 것 같다.
"오늘 식사는 즐거우셨을까요?"
나가시는 손님들께 한 번씩 꼭 묻는 질문. 그럼 대체로 즐거웠습니다. 정말 맛있었어요. 하고 대답하시는데 오늘의 디너만큼은 꼭 와인을 오픈했던 테이블에 마지막으로 묻고 싶어 계산대 앞을 자처했다. 오늘 식사는 즐거우셨는지. 제가 추천해드린 와인은 주문하신 음식과 조화롭게 어울렸을까요? 환하게 웃으며 약간 들뜬 분위기로 너무 좋았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말씀해주신 대로 비프타르트랑은 레드와인이 맛있게 어울리던데요. 칭찬 일색인 말들에 쑥스러워 다음 번에 오시게 되면, 제가 와인 전문가가 되어 더 좋은 추천을 해 드리겠다고 대답하자 오늘도 충분히 좋은 추천이었다고 이야기해 주시고는 떠나셨다.
오늘도 충분히 좋았어요. 충분히 좋다는 말이 종일의 수고를 덜어간 것 같다고 느꼈다. 너무 좋고, 아주 만족했다는 말도 좋지만 충분히 좋았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남았다. 부디 매일 충분히 좋은 손님들의 시간을 만들 수 있기를. 녁에서 저물어가는 모든 날들에.
20220114
충분히 좋은 날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