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바이 2021
여전히 카페 일을 하고 있고, 나는 어느덧 20대 중반이다. 제작년에 다니기 시작한 학교는 아직도 2학년을 채 마치지 못했고, 성적도 부진하다. 또 새 다이어리를 구매했지만 이전 것도 제대로 다 적지 못했고 3년전에 마음을 다지며 사 두었던 작은 글쓰기 노트도 다 채우지 못한 채 겉면만 헐어 가고 있다. 사기만 하고 읽지 않는 책이 쌓이는 만큼, 작가의 서랍에 쌓이는 글도 늘어난다. 언젠가 마무리 해야지 하고 두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의 21년 스물 넷의 사계절은 이렇게 다 지나간 것 같다. 무엇 하나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채로.
다들 어리고 좋을 때라지만 겪어본 사람들이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때로 돌아가면 난 진짜 열심히 살거야~ 진짜 좋을 때야~ 하고 말하는 지인들의 말도 한 귀로는 듣고, 한 귀로는 흘린다. 그 때로 돌아간대도 아마 열심히 살지 않을 거에요, 당신은. 왜냐면 지금의 나도 열심히 살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열심히 사는 건 힘드니까.
지나 온 시간이기 때문에 좋았더라고. 원래 지나가버린 것들은 별로 심각하지 않게 느껴질 때가 많으니까. 지나 왔기에 좋았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뜻은 아니지만 남들에게는 심각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어쨌든 나의 인생은 아니니까. 어찌 됐든 본인들의 삶은 이미 지나온 시절이니까.
지나온 2021년에는 많은 것들이 바뀌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번 직장이다. 누구는 여전히 카페 아르바이트나 하는구나 하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번 직장에는 유독 '커피'에 자부심을 가진 직원분들이 많다. 이 말인 즉슨 음료 퀄리티에 굉장한 신경을 쏟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압력도 제대로 올라가지 않는 구질구질한 머신으로도 그들은 종종 커피에 대한 지식을 나누고 내게도 알려 준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사용하는 그라인더와 머신은 구식이고 꼴통이라는 이야기. 제대로 된 커피를 추출하기 위한 준비에는 뭐가 필요한 지, 로스팅이 잘 된 원두도 중요하지만 커피 맛을 내기 위해서는 분쇄도와 추출량을 직접 조절해야 한다는 것도. 카페 알바만 5년을 넘게 했지만 어떤 이야기는 이곳에서 처음 듣는 것이기도 했다.
또 최근에는 라떼 아트를 연습중이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5년을 했는데도 내가 아직 스티밍(우유를 따듯하게 데우는 과정. 과정에서 폼을 만들고 부드럽게 거품을 깨야 한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처음에 나를 교육하던 분은 놀란 듯 했지만 이내 천천히 알려주셨다. 스팀 피처를 잡을 때는 손목에 많이 힘을 주지 않을 것, 손을 계속 대고 있지 않을 것-손을 붙였다 뗐다 하면서 온도를 체크하라고 했는데 이 대목을 알려주실 때 개구리 탕을 비유한 것이 좀 웃겼다. 개구리를 삶아 죽일 때 찬물일 때 부터 넣어 천천히 익어가게 만드는데, 피처에 손을 계속 대고 있으면 온도가 일정 이상 높아져도 잘 몰라서 적정 온도를 넘기게 된다고- 또 스팀 후에 폼을 천천히 굴려 깨는 법까지. 처음에는 자세도 서투르고 방법도 잘 몰라 헤매고, 스티밍을 할 때면 옆에 와서 기웃거리는 동료분의 모습이 부담스러워 잘 못하겠다며 웃어넘기곤 했는데 그럴 때면 더 할 수 있다고 말을 걸어 주셨다. 지금도 완벽하진 않은 스티밍 실력이지만 이제 어정쩡한 하트 정도는 그릴 줄 아는 실력이 됐다. 실력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서당개 보다는 늦었지만 이제 천자문 정도는 뗀 카페 아르바이트 5년차, 직원 3개월 차 디디.
카페 직원의 일상은 매번 똑같다. 사무직과 다른 점이라면 좀 더 몸을 쓰는 일이 많고, 현장에서 부딪혀야 할 일이 많으며, 하루하루만 잘 버텨내면 오늘의 업무가 내일로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 예전에는 장황하고 거창한 스스로에 대한 기대로 가득차서 살았다면 이제는 오늘을 살고 내일도 오늘처럼만 살기 위해 산다는 것.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꿈이 줄었고, 긍정적으로 말하면 현실적인 사람이 됐다. 꿈보다 오늘의 삶을 위해, 당장의 벌이를 위해, 그냥 나의 열심을 위해. 똑같은 일상마저도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사람.
많은 것들이 바뀐 일상에 여전히 사랑이나 설렘은 없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좋기만 하다. 누구에게 얽매이지 않는 일상이 처음인 것이다. 누군 그걸 사랑이라고 했다. 나의 시간을 모두 내어놓고 서로의 다름을 품어주는 것. 이제는 그게 사랑이 아니라 강요라는 것을 안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인의 다른 점은 사랑해달라고 했지만, 나의 다른 점은 고치려고 했다. 내가 싫어하는 본인의 행동은 신념이라 어쩔 수 없다고 했고, 본인이 싫어하는 나의 행동은 꼭 걸고 넘어졌다. 지나온 시간인데도 다시 떠올리면 진절머리쳐지는 것을 보면 아직도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이 지겹기는 한가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12월을 보내면서 22년에는, 22년에는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 내년에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찬찬히 잘 살아가고 싶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별 일 없지?'에 그냥 똑같지 뭐~ 하고 대답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크게 변하지 않고, 슬퍼하거나 외로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스물 다섯에는 좀 더 무난하게.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천천히 바뀌는 것들 사이에서 조용하게.
211208
조용하지만 열심히 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