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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Jan 21. 2019

편지

잘 지내나요?

 안녕. 

 그냥 오늘따라 괜히 우울해져서 편지를 써. 누구에게 닿을 지는 모르는 편지. 언젠가 불특정다수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써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다른 편지와 다름없이 어색하게 시작하는 게 사실 부끄럽다. 아마 이 편지는 다수의 어떤 사람들에게 보내는 게 되겠지만 쓰다 보면 또 '누군가'를 특정해서 쓰게 되겠지. 

 나는 요새 어중간한 재능이란 얼마나 불행인가 하는 생각을 해. 어중간하게 무언가를 잘 한다는 건, 그걸 놓을 용기는 없으면서 잡고 있고 싶기 때문에 위험하거든. 나는 내가 지금 시작한 일도 해도 되는 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내가 우유부단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고 생각해. 만약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대단하게 대단하고, 너무나 커다랗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것이라면 나는 고민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그렇진 않더라고. 내가 가진 건 너무 보잘 것 없고 누구나 이정도는 할 수 있고. 

 내 꿈은 꼭 손 사이로 흐르는 바닷물 같아. 눈앞에 놓인 건 너무 크고 장황한데 내가 쥘 수 있는 건 고작 두 손만큼일 뿐이니. 그리고 손 사이로 꽉 쥐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내가 쥔 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다 흘리고 나서야 깨닫는 거야. 나는 늘 그렇게 모든걸 흘려보내.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나는 너무 나태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사실 천성이 부지런떨어야만 하는 사람이라 더더욱. 다들 나아가고 있는데 나만 도태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해. 다들 발차기를 넘어서, 팔을 어떻게 쓰는지, 또 물에는 어떻게 뜨는지를 배우는데 나는 아직도 물장구 치는 얕은 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오늘도 나는 물에서 몸을 꺼내면서 아무것도 새로 해 나간 게 없는데 피곤하다는 마음만 들겠지. 나는 계속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나름 편지를 쓴다고 하면서 네 안부는 묻질 않았네. 잘 지내? 나는 앞에 봐서 알겠지만 사실 잘 지내지는 않아. 가끔 너의 sns를 보면서 나도 여행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아무것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게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생각도 해. 너의 연애를 보다가 나도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더 상처받고싶지 않다는 생각도 해. 관계는 매번 어려운 것 같아. 우리들의 모든 관계에는 공식이란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겪고 나니 공식은 없지만 레파토리는 항상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더라. 많은 관계를 거쳐온 건 아니지만 어떤 관계든 한 쪽이 손해본다는 기분은 지울 수 없는 것 같아. 흔히 사회에는 갑과 을이 존재한다고 하잖아. 물론 세상이 흑백은 아니지만. 꼭 둘로 나눌 수는 없지만. 우리들의 모든 관계에는 사실 흑백이 존재하고 갑과 을도 존재하지. 없다고 믿고 싶고 아니라고 하고 싶겠지만 사실인걸. 너무 어두운 쪽으로만 이야기했나. 그냥 내 생각은 이래. 강요하고 싶다거나, 설득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어. 

 사람들의 생각은 전부 조금씩 다르니까. 


 나는 새로운 일을 좀 시작했어. 돈이 되는 일은 아냐. 그런데 계속 하고싶었던 일이고 하려고 했던 일이고, 더 많은 종류의 사람들과 내가 좋아하는 걸 함께할 수 있는 환경에서 뭘 시작했어. 근데 이것도 새로운 관계의 시작 중 하나라고 생각해. 나는 어떤 집단에 속하게 되면 내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거든. 지금도 그래. 이번에는 좀 잘 해보고 싶거든. 모든 일을. 오래 버텨보고 싶어. 그런데 이런 집단일수록 .. 나만 잘 버틴다고 되는 일은 아니라는 거. 너도 알지? 

 언제나 하고싶은 걸 시작하는 건 힘들지. 그리고 모든 일에는 좋던 나쁘던 결과라는게 따르는 법이고. 근데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으려고. 그리고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내 시간을 여기 투자하면서 사는 거. 가끔 우울의 폭풍에 휘말릴 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런 말이 있잖아. 예술가에게는 조금의 우울이 필요하다는 말. 그게 조금이 아니라면 빈센트 반 고흐의 '영원의 문턱에서'같은 절망적인 그림을 그릴 지도 모르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나쁘지 않네. 훌륭한 작품 하나를 위한 예술가로서 능력을 전부 소진하는 것. 정말로. 빈말이 아니라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럼 최고의 삶인게 아닐까. 

 나는 여태까지 살면서 전력을 다해 뛰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이번에는 한 번 해보려고. 근데 맘처럼 잘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다 해봐야지. 아직 현실감 없는 어린애같은 말이지만. 나는 어린애니까. 


 안부를 묻는다고 해놓고 또 내 얘기만 잔뜩 했네. 잘 지내고 있길 바라. 언제나. 또 편지할게. 괜찮다면 네 근황도 알려 줘. 말하기 힘든 것들을 말해줘도 되고, 말하기 힘들다면 말하지 않아도 돼. 수박 겉핥기같은 안부 전하기라도 괜찮으니 잘 지내는 지. 또 편지할게. 안녕. 


2019.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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