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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Jul 01. 2019

Y

2019년 03월, 오후 네 시의 기록

 Y는 새로 일하게 된 카페 일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아침 시간에 졸음을 쫓아 가며 출근했다. 새벽과 아침 사이의 공기를 맡으며 휘적휘적 출근하는 길이 낯설었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출근해서 그녀가 할 일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냉장고를 켜고, 그라인더를 켜고, 머신 물을 빼고, 갖은 도구들을 제자리에 정리해두는 일. 보통 오픈 직후에 사람이 몰리지 않는 편인 가게였기에 그녀는 그렇게 해 두고 앉아서 책을 폈다. 하루 여섯 시간 내리일하는곳에서 앉아서 휴대폰만 들여다볼 수 없지 않은가. 대략적인 일을 마치고 나면 한 시간 정도는 붕 떴다. 책을 넘기면서 생각했다. 오늘은 어디까지 편하게 읽을 수 있을까. 

 

 아침마다 오는 손님은 거의 정해져있는 편이었다. 사십대 중 후반 정도로 보이는 화려한 무늬의 스카프를 한 아주머니와, 그 아주머니의 친구나 동생 쯤으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항상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해서 먹고 가겠다며 4인테이블을 혼자 차지하고 앉는 파란 점퍼의 남자. 고정적으로 오는 손님들은 이 정도. Y는 손님들이 무엇을 주문할  지 입을 떼기 전 부터 알고 있었다. 화려한 무늬의 스카프를 한 여자는 항상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먹고 간다고 주문했다. 작은 컵에 나갈 때도 있었고, 큰 컵에 나갈 때도 있었다. 매장 안에서 사용하는 머그잔은 사이즈가 두 개였는데 사장은 항상 용량 비슷하지 않나? 하고 이야기했다. Y는 웃으며 그렇네요, 하고 대답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괜한 말로 심기를 건들이고 싶지도 않았고 사장은 말이 잘 통하는 타입은 아니었기에 Y는 곧잘 입을 닫았다. 사장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지도 않고, 사장의 말을 귀기울여 듣지도 않았다. 묵묵히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아침의 손님들이 자리를 비우고 나면 점심이 되기까지 Y는 거의 혼자였다. 그런데 그 날은 조금 달랐다. Y가 책을 반 쯤 읽었을 때 손님이 몰렸다. 허둥거리며 주문을 받는 중에 백발의 노부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허둥거리다가 아직 주문을 하지 않은 노부인을 보고 주문하시겠어요? 하고 말을 걸었다. 노부인은 살짝 웃더니 안경을 고쳐 올리며 천천히 해요, 내가 조금 기다릴게요. 하며 건너편 창가 근처의 자리에 앉았다. 밀려있던 음료 주문을 모두 빼고 그녀가 한 숨 돌리고 서 있자 노부인은 그제야 다가왔다. Y는 미안한 마음에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주문하시겠어요? 하고 물었다. 부인은 손사래를 치며 


 아니에요, 나는 시간이 많으니까. 나는 시간이 많아서 괜찮아요. 


 Y는 이런 순간을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타인의 배려가 살갗으로 닿아 느껴지는 순간. 나의 상황을 이해해주고 괜찮다는 말을 해주는 여유. 부인은 아메리카노를 따듯하게 한 잔 주문하고는 다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런 상황이면 그녀는 뭐라도 더 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쿠키라도 하나, 음료라도 한 잔 더. 그러나 본인의 가게를 운영하는 게 아닌 Y의 입장에서는 조금 더 상냥한 말씨로 응대하는 것 외에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Y는 부인의 자리까지 커피를 가져다 주었다. 부인은 웃으며 고마워요, 하고 대답했다. 

 

 부인이 떠나고 나서도 Y는 부인과의 대화를 곱씹었다. 그 일을 곱씹어가며 일을 하면 세상에 두 명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진상들이 쳐들어와도 견딜만 했다. 타인과의 대화에서 위로를 얻는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소중한 일과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다가올 수록 그녀는 바빠졌지만, 바쁜 동안에도 부인과 나눈 짧은 대화는 잊혀지지 않았다. 항상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를 입에 달고사는 그녀에게 고마워요, 맛있게 잘 먹었어요 하고 일어서던 부인의 모습. Y는 내일은 어떤 모습의 상냥함이 찾아올까 하는 생각을 했다. 


2019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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