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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Jun 24. 2019

Y

2019년 03월, 월요일 오후 한 시 삼십 이분의 기록 : 카페

 아메리카노 세 잔이 주문이 들어왔다. Y는 아메리카노라고 쓰인 영수증을 보다가 샷을 내리기 위해 머신 앞으로 향했다. 습관처럼 2구짜리를 들고 탬핑 한 후 기계에 끼우고 바로 물 내리는 버튼을 눌렀다. 1구짜리를 탬핑하다가 문득 그녀는 아, 1구짜리가 더 오래 걸리는데 하고 생각했다. 다음에 아메리카노 세 잔이 들어오면 그때는 반드시 1구짜리를 먼저 내려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머그잔 세 개를 꺼내어 뜨거운 물을 부었다. 뜨거운 물을 다 따르고 샷까지 다 넣고 나서야 그녀는 주문한 이들이 곧 나갈 거라 테이크아웃잔에 달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딱히 허둥거릴 것도 없는데 그녀는 뜨거운 아메리카노 세 잔을 종이컵으로 옮겨 담다가 삐끗해 손목에 뜨거운 물을 조금 부었다. 요 근래 우왕좌왕했다. 뒤숭숭한 기분이었다. 




  Y는 하던 공부를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아 가까운 지인과 함께 극단 일을 해보기로 했다. 말이 극단 일이고, 사실은 막내로 들어가 잡다한 일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3월 중순 쯤 작게 올라가는 극을 마무리하고 Y는 오랜만에 시작한 일과, 오랜만에 갖게 된 개인적인 시간들이 낯설었다. 장기적으로 생각했던 공부를 마무리도 제대로 짓지 않고 후다닥 도망쳐 나왔다. Y는 스스로 도망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을 마음 한 켠에 계속 가지고 있었다. 

 공부를 하는 동안은 다른 것 보다 계속 같은 계획과 같은 시간에 움직여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 어려웠다. 그녀는 그간 자신이 얼마나 멋대로 살아왔는 지 깨닫게 됐다. 6개월 쯤 되었을 때, 그녀는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내가 목표를 이루고 나면 행복해질까? 하는 생각.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전혀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도 6개월을 더 공부했다. 사실 새로운 것을 시작할 기회도, 용기도 없었다. 막상 시작한 것이니 끝은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맥없이 쓰러졌다. 어디라도 징징거리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그녀는 주변에 기댈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시작한 일들이 모두 순탄하지는 않았다. 3월의 공연은 올라가기도 전부터 사소한 트러블과 잦은 스케줄 변경으로 문제가 많았다. Y는 대본 작업만 함께 마치고 나서 단체 연습에서 빠지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작고 잦은 절망들이 이어졌다. 나는 뭘 하는 사람이지? 하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끊임없는 절망의 딜레마에 빠지기 전에 그녀는 다시 뭐라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일을 구했다. 일하던 곳만 돌고 돌아 전전하던 그녀에게 정말 오랜만에 새로운 곳이었다.  


 새로 일하게 된 카페는 좁고 아담했다. 전체적인 분위기도 화사하며 깨끗했고 새로 생긴 매장이라 무엇보다 서로간의 텃세가 없어 좋았다. 다들 쭈뼛거리기는 했지만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편이었고 누구 하나 모난 부분이 도드라지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알바를 많이 옮겨 다녔지만 다같이 모여서 아르바이트 교육을 받았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다같이 모여 교육을 받던 날을 그녀는 종종 떠올렸다. 

 처음 교육받던 날 아르바이트 교육 치고는 꽤 많은 걸 배우기도 했다. 그라인더를 조절하는 방법, 원두가 날씨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는 것, 머신을 다루는 방법의 정석.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원두는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가운 아메리카노는 보통 어디든 비슷한 맛이 나지만,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만들때는 까다롭게 굴어야 한다던 말. 그 말을 하던 사내는 어딘가 불쾌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우물거렸다. 그래서 이렇고, 저렇고 하면서. 따듯한 아메리카노는 온도나 원두의 알갱이 크기, 탬핑 정도에 따라 맛이 미묘게 다르다고 머신을 툭툭 짚어가며 말했었다.

 사실 커피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딱히 즐겨 마시지는 않았다. 공부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아침에 하루 한 잔 투샷이 기본인 커피에 샷을 하나 더 추가해서 죽을 만큼 피곤한 기분을 떨치려고 마시기는 했었지만. 그래서 출근하고 항상 한 잔씩 커피를 내려 마시는데도 이게 맛이 괜찮은 건지, 아닌 건지 긴가민가한 기분이 들곤 했다. 


 늦은 오후 쯤이 되면 사장이 출근했다. 그녀가 전에 일했던 카페는 사장이 도저히 왕래가 없었기에 조금 어색했지만, 또 금방 적응했다. 사장은 출근과 동시에 샷을 내려 그날 그날의 커피맛을 확인했다. Y는 그럴 때면 조금 긴장했다. 혹시 내가 내려서 맛이 이상해진 건 아닐까. 사장은 대부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셨기에. 그녀가 커피잔에 물을 붓고, 샷을 넣어 크레마가 은은히 퍼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Y는 긴 하루 중에 제일 중요한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장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잔을 들고 호록 마시고는 변함없이, 맛있다거나 괜찮다고 말을 덧붙였다. 그제서야 Y도 마음이 놓이는 것이었다. 괜찮네, 오늘 커피. 대단하지는 않지만 한 마디로도 괜찮은 기분을 만들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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