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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한 Oct 30. 2023

월하정인 - 달빛 아래의 비밀

소소한 일상, 가벼운 역사 한잔

풍속화(風俗畵)란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반영시킨 그림이다. 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와

상공업 발달로 인해 부를 축적한 백성들이 많아지자 자연스레 서민들의 생활 수준 및 문화

수준도 높아졌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 그동안 무시되던 일반 서민들의 풍속(일상생활 속 반복되는

생활습관)이 관심을 받기 시작하며 풍속화 역시 유행하게 된다.     

    

풍속화 하면 바로 생각나는 화가, 단연 ‘혜원 신윤복’일 것이다. 섬세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으로 양반들의 풍류 생활,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린 조선의 대표 화가이다. 주요작품에는 미인도, 단오풍경 등이 있는데, 이런 신윤복의 여러 작품 중에서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유발한 그림이 있다. 바로

‘월하정인(月下情人)’.

신윤복의 월하정인

달빛 아래 두 남녀의 데이트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유교 사상과 신분제의 모호함을 겪고 있던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된다. 이 월하정인을 보고 있으면 문득 궁금해지는 한 가지. 그림 속 두 남녀는 언제

그리고 몇 시에 만난 것일까?

     

월하정인의 시기를 알 수 있는 흔적은 그림 곳곳에 숨어 있는데, 그 첫 번째 단서는 바로 그림속에 그려진 ‘달’이다. 그런데 달이 위쪽으로 볼록하게 그려진 것이 특이하다. 한 달을 주기로 달이 차고지는 과정 속

절대 나 올 수 없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신윤복이 천문에 무지하여 아무렇게나 그린 것일까?

야금모행(좌), 월야밀회(우)

신윤복의 그림을 보면 달이 그려진 작품이 적지 않다. 월야밀회(보름달), 야금모행(그믐달)에도 달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런 여타의 작품에서는 정상적인 달의 모습을 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런 점을 고려해 보면 신윤복이 잘 몰라서 월하정인의 달을 저렇게 표현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 월하정인의 달은 왜 저런 모양으로 표현된 것일까? 달이 그림 속의 모습처럼 보이려면 하나의 가능성만이 존재하는데, 바로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지는 ‘월식(月蝕)’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두 번째 단서는 월하정인 속 새겨진 글귀가 된다.

월하정인 속 글귀

월침침야삼경(月沈沈夜三更) - 달은 침침해 밤 3경이 되었는데,

양인심사양인지(兩人心事兩人知) -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


해당 글귀는 조선 선조시기 좌의정을 지낸 김명원의 시 일부를 인용한 것인데,

글귀 중 보이는 ‘야삼경(夜三更)’은 ‘자시(子時)’ 즉, 자정을 의미한다.

‘월식’과 ‘자정’ 두 개의 단서로 추론할 수 있는 또 한가지는

그림 속의 계절이 여름이라는 것이다.

월식은 보름달이 뜨는 날 이루어지며, 보름달은 자정 때에 가장 높게 떠오른다.

그런데 그림 속 달의 위치는 겨우 처마 근처에 머물러 있다.

이는 달의 고도가 가장 낮은 여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월식에는 개기월식(달 전체가 가려지는 현상)과 부분월식(달 일부만 가려지는 현상)이 있다.  

헌데 여름의 자정에 진행되는 개기월식은 달의 왼쪽부터 가려져 오른쪽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월하정인’ 속의 달 모양이 나타날 수 없다.

그러니까 그림에서의 달은 부분월식이 진행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신윤복이 활동하던 시기는 18C 중반부터 19C 중반까지였고,

이 시기 부분월식이 진행된 날은

1784년 8월 30일과 1793년 8월 21일 단 두 번이었다.  

그런데 1784년의 경우에는 8월 29일부터 며칠간 비가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즉, 월식이 진행되었어도 기후의 영향으로 관측될 가능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1784년의 경우에는 8월 29일부터 며칠간 비가 내렸다는 기록

반면 1793년 8월 21일은 월식이 관찰되었다. 승정원일기에서도 그 시기 월식이 진행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1793년 8월 21일, 월식과 관련된 기록

즉, 이들은 1793년 8월 21일에 만나 자정까지 은밀히 데이트를 즐겼다.

     

그럼 월하정인 속 두 사람의 신분은 어떻게 될까? 그것은 인물들의 머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남자의 머리에 쓰여진 갓은 조선시대 남성들의 자존심이자 양반들의 지위를 나타내는 관모였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그림에 그려진 ‘갓’처럼

머리가 총모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모정이 좁고 양태는 어깨를 넘을 만큼 넓은 것이 유행했으며,

또 그 유행을 따라야 멋쟁이였다.

즉 월하정인에 그려진 남자는 멋을 좀 아는 양반인 것이다.

여성은 쓰개치마를 착용한 상태였는데,

그 안쪽으로 머리가 높게 솟아오른 것으로 보아 풍성한 ‘가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성들이 갓으로 멋을 냈다면 여성들에게는 가채가 존재했다.

당시에는 가채가 크고 화려할수록 아름답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이 가채패션은 다름 아닌 기생들이 주도 했다.

가채를 한 기생과 갓을 쓴 양반

야심한 시각 몰래 이루어진 양반과 기생의 만남.

그러나 이들은 지금 데이트를 끝내고 아쉬운 이별을 앞두고 있다.

양반의 눈길은 기생을 바라보고 있지만 발길이 반대편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헤어짐이 아쉬워 가던 길을 멈추고 기생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앞서 언급된 그림 속의 글귀.

즉, 김명원의 시 역시 전체 내용을 살펴보면 이별의 아쉬움을 노래하는 시이다.


한여름 밤이던 1793년 8월 21일 자정,

양반과 기생은 남몰래 즐긴 데이트를 끝내고 그렇게 이별 직전에 와있었다.


월하정인을 통해 단순히 그 시기만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림 속 그려진 패션으로 인물들의 신분을

그리고 그 신분들 통해 조선 후기 신분제의 모호함을 엿볼 수 있게 된다.

또한 16C 지어진 시가 200년이 지난 18C에 유행하고 있다는 것 역시

월하정인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쩌면 풍속화는 우리가 과거를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록이자

역사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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