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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 Jan 25. 2024

카이막, 페이팔, 햇살

백수의 일상

숙면을 위해 커피를 끊은 지 일주일 정도 되었다. 확실히 평소보다 깊게 자는 것 같다. 아침에도 자연스럽게 피곤하지 않은 상태로 눈이 떠진다. 하지만 아침에 커피 향이 집안에 퍼지지 않아서 섭섭하다. 무엇보다도 며칠째 오전 내내 두통이 있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지만 결국 오늘 아침 일찍 동네 카페에 갔다. 아침에 한 잔 마시는 정도는 괜찮겠지. 카페에 갔더니 카이막 토스트가 있다. 비싼 곳은 9천 원 이상 하던데, 여기는 6천 원이다. 백종원이 천상의 맛이라고 한 카이막. 뒤늦게 유행을 따라가 보려 했으나 막상 시키려니 아깝다. 마트에서 카이막 크림을 사다가 집에 가서 먹어야지. 내 집에 있는 치아바타와 꿀과 피스타치오가 카페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거니까. 핑계 김에 카페에서 신상 원두도 한 봉지 샀다. 커피 없이 카이막을 먹을 수는 없잖아. 아 물론, 홍차와 먹는 거라고 듣긴 했다. 흠흠.

마트에 가자 고민이 시작되었다. 소문을 듣자 하니 카이막은 클로티드 크림과 거의 같다고 하던데. 검증된 클로티드 크림을 살 것이냐, 처음 보는 브랜드의 카이막을 살 것이냐. 성분을 보니 클로티드 크림은 첨가물이 없고, 카이막은 인공 첨가물이 들었다. 고민 고민 하다가 그래도 기왕 온 거, 카이막을 골랐다.

집에 와서 새로 산 원두로 커피를 한 잔 내리고, 올리브 치아바타를 살짝 굽고, 카이막을 접시에 덜어 꿀을 듬뿍 뿌리고 피스타치오를 올렸다. 드디어 나도 카이막을 먹는다, 야호. 한 입 먹어보니 아주 새로운 맛은 아니다. 소문대로 클로티드보다 조금 가벼운 맛. 맛있다. 맛있어서 싹싹 긁어먹었다.

문제는 10분쯤 있다가 생겼다. 가끔 외식을 하고 나서 구토를 느낄 때가 있는데 - 원인은 잘 모른다. 알레르기인지, 컨디션이 안 좋은 것인지, 음식에 인공 첨가물이 있는 것인지 - 딱 그 증상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이유를 모른다. 늘 먹는 치아바타는 원인이 아닐 테니, 커피를 끊었다가 갑자기 연거푸 두 잔을 마셔서이거나 처음 먹는 카이막 때문일 수 있겠다. 클로티드 크림에 이런 증상이 있었던 적은 없어서, 굳이 꼽자면 카이막에 첨가물이 들어서? 이럴 줄 알았으면 클로티드 크림을 살걸 그랬지. 하지만 그랬다면 카이막이 무슨 맛인지 두고두고 궁금했겠지. 물론 내가 먹은 것은 독일산이라 진정한 터키식 카이막이라는 보장도 없긴 하지.

오늘의 교훈은 괜히 SNS에 나오는 거 한 번씩 다 먹어보고야 말겠다는 쓸데없는 오기를 버리자는 것.




미국에 있을 때 사용하던 페이팔 계정이 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아주 오랫동안 사용할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계정이 잠겼고, 신원 확인이 불가하여 - 가입 당시 사용한 은행계좌도 없을뿐더러 그 은행 자체가 인수 합병으로 사라졌다. - 정말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계정을 살리고 로그인을 했다. 잔액이 조금 있어서 아마존이나 아이허브 직구를 할까 하다가, 그냥 잔액을 전부 기부하고 서비스를 탈퇴했다. 원래 거주 국가가 변경되면 기존 계정을 닫아야 하니 진작 했어야 하는 것을 20년 간 버려둔 것이었다. 계정을 삭제하기 전에 등록된 정보를 마지막으로 보니 '그래, 내가 한때 저 은행에 저런 계좌가 있었지', '저 휴대폰 번호를 사용했었지', '저 주소에 살았었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지워버리기 아쉬웠다. 그래도 탈퇴하고 나니 오랫동안 밀린 집 청소를 한 듯 후련하다. 그래, 과거를 두고 앞으로 나아가야지.




오후가 되니 또 집 안이 훅 밝아졌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바닥에 긴 선을 그린다. 바닥에 비친 햇살은 다시 집안 깊숙한 곳의 천장으로 반사된다. 천장에 부딪힌 햇살이 다시 방 전체로 산란한다. 태양만큼 경이로운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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