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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 Mar 03. 2024

...

며칠 전에 제안하기를 통해 메일을 받았다. 만나서 인생 조언을 듣고 싶다는 부탁이었다.

나도 다른 사람의 글을 보다가 혼자 내적 친밀감을 키우기도 하고 직접 만나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야, 너도?' 외치며 동질감을 느끼고 싶기도 하다. 그러니 그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0. 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그건 솔직하게 썼기 때문일 것이고, 내가 솔직하게 쓸 수 있는 이유는 익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만나거나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는 없습니다.


1. 물론 나도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의 의견이 듣고 싶다. 그럼에도 코멘트를 닫아놓은 이유는 어차피 코멘트에서 발전적인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악플도 두렵고. 무엇보다도 나는 소위 네이버 블로그에서 유래한 특유의 친목 문화(?)를 아주 싫어한다. 어떤 느낌을 말하는 것인지 아는 분은 아실 듯.


2. 나는 남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목적을 가지고 재테크를 한 사람도 아니고 특출 난 재능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내가 주도적으로 현 상황을 만든 게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 내 상황에 이른 길이 궁금하다면, 그저 나는 운이 좋았다고 밖에 해 줄 말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운은 아파트가, 주식이 몇 배 뛰었다는 게 아니다. 운 좋게 좋은 학교를 졸업했고, 운 좋게 좋은 회사에 들어갔고, 운 좋게 살면서 돈이 많이 드는 사건 사고가 없었고, 운 좋게 인플레가 대체로 심하지 않은 시기였고, 운 좋게 IT 분야 몸값이 빠르게 오른 시기였다. 운 좋게 나는 소비 욕구가 크지 않은 사람으로 태어났다.


3. 어차피 지금은 내가 보낸 시기와 많은 게 달라지고 있어서 나도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다.


4. 나는 저속노화 선생님의 '경박단소'라는 말을 좋아한다. 지금 내 생활을 공유하는 가장 큰 목적은, 경박단소한 삶을 사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말해보고 싶어서이다. 그러면 은퇴자든, 사회초년생이든, 실직자든, 막연한 두려움을 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경박단소한 삶 역시 운이 좋을 때만 동작한다. 치과 진료만 받게 되어도 쉽게 깨지는 삶이다. 그렇더라도 마음이 조금 편해지기를. 최소 목표를 설정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5. 과거 10년간 지출 내역을 기록해 왔듯이, 지금의 기록도 10년 정도는 누적되어야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부디 10년 후의 내가 잘 살고 있기를.


6. 솔직히 고백하면, 백수 6개월도 되지 않은 이 시점에 번뜩 불안감이 몰려왔다. 이렇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가 싶은 존재론적 불안감이다. 아직은 괜찮다. 그런데 가까운 미래에 정신적 타격이 올 것 같은 느낌이 왔다. '신사는 직업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했다지만, 나 어떻게 살지? 책을 읽고 문화 소비생활만 하며 살 수는 없다. 재능 없음이 무척 안타까운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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