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3천 원
날이 추워졌다. 날이 추워졌으니 따듯하고 아늑한 카페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라떼와 갓 구운 빵으로 아침을 먹겠다는 계획을 세우며 어제 잠이 들었다. 날이 추워졌으니, 뜨듯한 국밥도 먹고 싶어서 몇 군데 장소를 추리며 잠이 들었다. 며칠 전 난방을 켠 탓에 기온이 떨어졌지만 오히려 평소보다 따듯한 방에서 눈을 떴다. 훈훈한 집, 너무 좋아.
갈 곳은 정했는데 메뉴를 정하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들고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가계부를 보았다. 허, 많이 쓴 줄은 알고 있었으나, 9일 만에 예산의 90%를 썼다. 계획에 없던 자동차와 몸 유지보수비 때문이다. 남은 돈 6만 3천 원. 남은 날 21일. 오, 의외로 숫자가 잘 떨어지네? 하루 3천 원, 한 끼 천 원. 하하하.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번갈아 떠오른다. 하루 3천 원으로 21일 살아보기 vs 포기하고 예산 초과하여 살기.
남은 날이 10일 정도면 모를까 21일은 좀 길다. 자신 없다. 한 끼 천 원, 물리적으로 가능은 한가? 봉지라면 한 개도 7-800원인데. 라면 사리를 사서 된장 풀고 끓여 먹을까... 마트식빵과 잼을 사서 버텨볼까. 둘 다 칼로리 뻥튀기는 확실한데, 흠흠. 하루 2끼만 먹을까? 그러려면 단백질과 지방 비율을 높여야 하는데.
어디 보자, 일주일에 2만 원. 마트 앱을 열었다. 오트밀 800g, 렌틸콩 2.7kg, 양배추 한 통, 콩나물 300g, 계란 한 판 30개, 이렇게 구매하면 얼추 2만 원. 이거면 일주일 굶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양배추와 콩나물은 두부 800g과 새송이 버섯 600g으로도 교체 가능. 해볼 만할지도...?
아, 그러고 보니 나에게 비자금이 있구나. 현금 몇 만 원과 온누리 상품권, 서울페이 충전금액이 있다. 시장 가서 장 보면 과일도 먹을 수 있고, 서울페이로 식당과 카페도 갈 수 있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 눈 가리고 아웅이라 성취감이 없을 테지.
일어난 지 두 시간 반 넘게 시뮬레이션한답시고 아침은 안 먹고 호기심에 하나 사놓은 방탄커피만 마셨다. 근데, 이거 포만감도 있고 생각보다 맛있다. 커피에 버터라니 무슨 괴식이냐 싶었는데 별로 느끼하지 않고 의외로 달달하다. 유제품의 단 맛인가. 물론 개 당 3천 짜리라 식사 대용으론 무리.
밖에 쓰레기 버리러 잠깐 나갔다가 추워서 바로 들어왔다. 오늘의 첫 번째 관문인 카페 나들이는 추위 덕에 무산되었으니, 시간을 벌었다. 조금 더 두고 보다가 내키는 대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