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식하고 쳐다보면 안 모인다
2. 신경 쓰지 않고 버려두면 쑥쑥 불어난다
첫 취직 후 한동안은 월급을 급여계좌에 쌓아두기만 했다. 아무도 돈을 어떻게 관리하라고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그러다가 몇천만 원이 쌓이고 나서 정기예금을 들기 시작했다. 금리가 얼마인지도 몰랐다. 그냥 은행에서 만기 되었다고 연락이 오면 그동안 쌓인 월급을 더해 재예치를 했다. 10년간 3-4개의 정기예금을 그렇게 돌렸다.
적극적으로 자산증식을 꾀하진 않았지만 대신 지출이 적었다. 지출도 의도적으로 통제한건 아니었다. 고민 없이 수십만 원짜리 물건을 사고, 해외여행에 몇 백을 쓰고, 팀원들과 밥 먹을 때면 의례히 내가 냈으니. 결혼하지 않은 가장 나이 어린 팀장이라는 이유로 밥과 커피를 내가 사는 것을 다들 당연시했다. 심지어 유부남 옆팀 팀장들도 나에게 얻어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얄밉다. 나에게 부르주아니 어쩌니 말하면서 정작 자기들은 나보다 비싼 자동차, 비싼 옷에 비싼 취미생활을 하며, 밥 값 커피 값은 서민이라 얻어먹어야 한다고 하니.
그래도 이건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은 아니니. 그 외 평소에는 하루에 한 푼도 안 쓰기도 했다. 출퇴근은 걸어서, 밥은 회사가 주는데 그나마도 일하다가 건너뛰니, 결과적으로 내 지출은 누구보다도 적었다. 5평 원룸에 사는 비정규직보다 지출이 적었다. 대출이 없고 월세가 나가지 않고 식비와 교통비와 병원비가 들지 않으니. 가난한 사람이 삶의 비용이 더 크다는 말이 있는데 맞다. 참 아이러니하다.
9년쯤 지났을 때 6억이 모였는데, 사실 산술적으로 생각하면 이해는 잘 안 간다. 일 년에 5-6천 정도 저축했나? 가능한가? 잘 모르겠다. 의식적으로 6억을 목표로 9년간 월 500씩 저축하겠다 생각했으면 불가능했을 거 같다.
이때 처음으로 총자산이 얼마인지 들여다보았고 돈을 더 모아야겠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내 친구들이 다 주식 펀드 이야기를 했고 나는 대기업에서 불안정한 스타트업으로 옮기는 때였다.
주식을 시작했다. 이후 10년 간 상승기였지만 그럼에도 돈은 생각만큼 불어나지는 않았다. 10년간 어찌어찌 또 돈은 모였다. 하지만 손실의 고통이 언제나 더 크게 와닿는 법이니 잃은 기억만 머릿속에 남았다. 그래도 예금보다는 조금 나은 수익률이었다.
신경 쓰지 않으면 돈은 쑤욱 불어난다. 단, 소득이 많고 지출이 적어야 한다. 재테크를 하려면 일단 고연봉자가 되는 게 좋다. 불어나는 속도가 다르니.
그런 면에서 결혼이 최고의 경제적 투자라는 말도 있다. 수입이 두 배가 되고 상속도 두 배로 받고 인적 네트워크도 두 배가 되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자산을 늘릴 수 있다고.
잊고 살면 돈이 모이는 까닭은 심리적인 이유 외에도 실질적 이유가 있는 거 같다. 딴 것에 눈 안 돌리고 일만 파고들면, 결과적으로 연봉이 오르고 승진을 하고 인센티브를 더 받게 된다. 소득이 늘고 쓸 시간이 없으니 자산증식이 가속화되는 것이다. 심지어 회사에는 공개되지 않은 보상규정도 있었다. 과제 인센티브와 리텐션 목적의 개인 인센티브. 알려진 바로는 연봉의 50%까지가 인센티브인데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받았었다.
주식을 시작한 이후 간간히, 근래 퇴사일을 받은 이후로는 매일매일, 계좌 잔고를 들여다본다. 이상하지. 돈은 잘 불어나지 않는다. 갑자기 줄어들기도 한다.
월 세후 200을 받으려면 3% 이율로 예금 10억이 필요하다. 최고의 재테크는 자신의 몸값을 올리는 것이라는 말이 다시 한번 실감 난다.
물론 40대 후반 개발자인 나는 기술적으로 더 몸값을 올릴 자신은 없다. 관리직으로 전환하고 싶지는 않으니 더 올라갈 곳도 없다. 주변 또래를 보면 C-level이 되거나 희망퇴직을 하고 더 작은 회사로 가거나 둘로 나뉜다. 자영업을 하던 친구들은 결국 재취업을 한다.
고민이다.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시대.
일단은 통장잔고 들여다보는걸 좀 자제해야겠다. 본들 안 본들 달라지지 않고 마음만 불편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