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소 Oct 21. 2023

제주 3박 4일

백수의 첫 여행

마지막 출근을 마치고 자유인이 된 것을 기념하는 첫 여행이다. 항공 마일리지가 많이 쌓여 있어서, 쓰지 않으면 만료될 마일리지인지라, 이참에 제주나 갔다 오려고 한다.


준비

그런데 여행 가기 전의 두근거림이 없다. 공항까지 움직이는 게 귀찮고, 무엇보다 내심 돈이 아깝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월급 없이 사는 게 처음이라 마냥 어색하다. 3박 4일에 30만 원은 쓸 터인데, 이 ‘경험’이 정말 이 돈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남들이 다들 힐링 여행 어쩌고 하니 나도 그에 휘둘리는 것은 아닐까? 헷갈리는 와중에 약간의 의무감, 퇴사자의 통과의례 같은 기분으로 비행기와 숙소를 예약해 버렸다.


백수의 특권인 평일 여행. 플레이스캠프 제주를 3박 예약했다. 플레이스캠프는 예전부터 한 번 가보고 싶던 곳이었다. 서울 중저가 호텔 하루 비용으로 3일을 묶을 수 있는데, 그에 비해 시설도 세련되고 깔끔하다. 내심 아쉬운 점은 평일 할인이 없다는 것.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방에 묵고 싶었는데, 몇 년 전에 내가 알던 가격보다 올라서 가장 저렴한 스탠다드룸을 예약하려 했다. 공식 홈페이지에서 17만 원인데 Booking.com에서는 15만 원. 예약 버튼을 누르려다가 잠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Agoda에서 스탠다드 플러스룸이 16만 원이다! 냅다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플러스룸으로 예약했다. 잠시 뿌듯해하다가 Agoda에서 스탠다드룸을 예약하면 14만 원인데 괜한 낭비인가 이내 후회가 된다. 1~2만 원 차이에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다니. 2백만 원 정도는 미련 없이 쓰던 과거의 나, 이젠 안녕.


마일리지로 항공편을 예약해도 유류할증료와 세금으로 34,400원을 내야 한다. 항공 + 숙소 3박 = 198,885원

마일리지 항공편이라 시간대가 그다지 좋지는 않다. 갈 때는 프레스티지석이라 6,000마일을 공제한다. 프레스티지라 해도 크게 기대할 건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소소하게 기쁘다. 나, 프레스티지석 타는 사람이오.


오는 날은 오후에 탑동의 아라리오 뮤지엄에 들렀다가 저녁 비행기를 탈 생각이었는데, 숙박비로 잠시 고심하는 사이 표가 매진되어서 그냥 오전에 바로 공항으로 와야 한다. 뭐, 아직 마일리지는 많으니까, 제주 시내쯤은 당일치기로 갔다 와도 될 만큼.


숙소 주변 동네식당을 찾아보니 현금만 받는 곳이 꽤 있다. 문득 당근거래로 모아둔 현금이 생각난다. 여행 경비는 비자금으로 처리할 수 있을 듯하다. 기쁘다.


가는 길

그래도 오랜만의 여행이라 기대감에 들뜬 것인지, 공항에 두 시간 반이나 일찍 도착했다. 3층에서 바이오 정보를 등록하고 시큐리티를 지나 아시아나 라운지에서 두 시간 정도 시간을 보냈다. 깔끔한 라운지와 커피, 우대받는 기분이 좋다. 앞으로 제주행 마일리지 항공은 무조건 비즈니스로 해야겠다. 기내 좌석도 생각보다 넓고 편했다. 음료 선택은 무심한 듯 쉬크하게 생수를 골랐다.


제주공항에 내리자 이국적인 야자나무들이 보인다. 기분이 몽글몽글해진다. 제주도는 정말 오랜만이다. 회사에서 준 숙박권으로 15년 전쯤에 온 게 마지막이었으니.


101번 버스

공항에서 101번 버스를 타고 고성리로 이동했다. 101번 버스는 해변 도로를 따라 달리는데 창밖으로 내륙과는 완연히 다른 토양과 바다와 공기의 색의 언뜻언뜻 비친다. 제주도임을 실감한다.


플레이스캠프 제주

드디어 왔다. 친구가 올린 사진을 보고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6년이 지나 겨우 오게 되었다. 해가 거의 저물어간다. 주중이라서인지 다들 관광에서 귀가하지 않은 것인지, 조용하고 한산하다.

방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작다. 짐을 어떻게 풀어 정리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그래도 머무르는 내내 일출을 방에서 직관했으니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도착 직후. 방에서 보이는 성산일출봉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성산일출봉도 좋고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바다도 좋고 사람들 사는 읍내 구경도 좋았다. 난개발이 된 못생긴 건물들은 좀 아쉬웠지만 관광지 주변으로 모이는 자본주의 욕심을 어찌하겠나.

보룡제과

마늘 바게트와 커피크림빵(6500원)을 샀더니 맛보라며 빵을 하나 더 넣어준다. 첫날 저녁과 둘째, 셋째 날 아침으로 먹었다. 평범한 동네 옛 빵집.


광치기해변

광치기 해변에는 4.3 표거석이 있다. 여기가 관광지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보고, 알고, 잊지 않고, 애도할 수 있어서.


그냥 지나가려고 했는데, 해변 주차장 노점 아주머니가 귤 한 바구니에 5천 원이에요 하며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왠지 좀 친근하고 애틋해서 한 바구니를 샀다. 겉모양에 흠집이 있긴 하지만 속 알맹이는 멀끔하고, 많다. 엄청 많다. 가는 날까지 귤만 삼시 세끼 먹어야 하나 싶을 정도로, 30개쯤, 2kg쯤 되려나. 덕분에 비타민C를 잔뜩 섭취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처럼 손끝이 노래지려나.


프릳츠

둘째 날 아침 일찍 성산일출봉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러 책 한 권을 읽고 왔다. 창가자리의 전망이 엄청난데, 10월 중순인 지금은 오전 중에 낮은 고도의 역광이 비추어 창가에 앉아있으면 눈이 부시고, 11시 전후가 되면 빛의 각도가 책 읽기 딱 좋아진다. 물론 그때부터 사람도 많아지므로 슬슬 책을 덮고 4인용 테이블에서 일어나 나왔다.


성산포성당

원래는 성산일출도서관에 가려했는데 시설보수로 공사 중이라 근처 성당에 잠시 들러보았다. 예배당은 천장이 나지막한 것이 특색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문과 가구가 오래된 건물 특유의 따듯함과 정성을 느끼게 한다.

고성장터국밥

몸국을 먹으러 갔다. 눅진하고 잡내도 없는 것이 괜찮았다. (7000원)

동네 주민들이 들르는 밥집은 고성오일장 근처에 모여있는 것 같다. 허름하되 비수기 평일에도 계속 사람이 오간다.


미소단밥

숙소 앞 1인 갈치조림집(부촌, 12000원)을 갈까 했는데, 백반이 먹고 싶어서 미소단밥, 시골밥상, 일오반식당 중에서 고민하다가 전날 안 가본 골목길을 가보려고 미소단밥으로 선택했다. 푸짐하다. 혼자 갔는데도 반찬을 너무 넉넉히 줘서 고맙고 미안했다. 억지로 싹싹 모두 긁어먹느라 평소보다 너무 많이, 짜게 먹었다. 처음 내올 때 안 먹는 거 몇 개 무를걸 그랬지. 그래도 이럴 때 아니면 내가 언제 9첩 반상을 받아보랴. (9000원)


도렐

책을 들고 셋째 날 오후에 방문했다. 폴딩 도어를 완전히 젖혀서 한쪽 벽이 야외와 통하는 모습에 홀려 들어갔다. 실내의 거대한 여인초와 아라우카리아가 바람에 조금씩 흔들린다.

나는 원래 크림이 들어간 커피를 싫어하는데, 한 번 먹으면 잊지 못할 커피 맛 운운에 살짝 넘어간 상태였다가 메뉴판에 제주 한정이라 쓰인 문구를 보는 순간 덥석 쑥하리를 시키고 말았다. 한입 먹고 바로 후회했다. 익히 아는 크림 맛에 무려 6300원(숙박객 10% 할인)을 버리다니. 싫어하면서도 소위 나만 뒤처질까, 나 모르는 엄청 좋은 게 있을까 싶어 홀리는 이 마음을 반성한다. 매번 후회하면서도 반복하여 낚이는 나를, 음, 미리 반성한다.


읽은 책

제주에 있는 동안 두 권의 책을 읽었다.


긴 연휴인 것만 같은데 사실은 평일이라는 게 매우 기묘한 감각이었다. 세상은 두 개의 시간선이 따로 흐르는 걸까.


총비용: 25만 원.

매거진의 이전글 독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