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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게트

by 소소

프랑스 사람에게 '파리에 가는데 맛있는 빵집 알려줘'라고 물으면 잠시 생각하다가 '아무 빵집이나 가도 다 맛있어'라고 말한다. 사실이었다. 워라밸이 너무 훌륭하여 관광객 입장에서는 게으르다 여겨지는 나라 프랑스. 하지만 프랑스인답지 않게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빵집과 카페였다. 아침 일찍 가장 먼저 문을 여는 빵집은, 마치 동네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정말로, 모든 동네 빵집 빵이 맛있었다.


짐은 가벼운 배낭 한 개에 비수기였던지라, 나는 버스 정류장이나 기차역에서 즉흥적으로 아무 곳이나 골라 표를 사서 이동하고는 했다. 그리고, Rennes를 중심으로 Saint-Malo, Mont-Saint-Michel을 둘러보던 와중에 잊지 못할 문제의 장소 Hédé에 가게 된다.


출발지와 도착지가 어디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금요일 오후였고 겨울이었다. 애초에도 관광지라고는 할 수 없는 곳이었는데, 적어도 마을에 하나는 있어야 하는 호텔이 없었다. 있기는 있었는데 영업을 하지 않고 있었다. 식당도 선술집 같은 곳 딱 한 곳만 열려 있었고, 내가 타고 온 버스가 막차라 다시 마을 밖으로 나가는 버스는 월요일이 되어야 운행을 했다.


선술집에 들어가 사람들을 붙잡고 사정을 이야기하면 민박할 곳 하나는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외부 도시로 차를 태워줄 사람이 있을지도. 하지만 문득 모든 것이 무섭고 불안해졌다. 고립된 마을에 도착한 외지인. 영화에서 보던 모든 나쁜 상상이 떠올랐다.


성당에 가서 사정을 이야기해 볼까 했다. 문이 열려 있으면 예배당 의자에 누워 잠을 잘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성당 문도 닫혀 있었고, 성당 주위 풀밭과 나무 숲에 깨어진 술병들이 있었다. 아, 문득 두려웠다. 이 근처에 술 마시는 불량배가 있나 보다.


지도를 펼치고 살폈다. 1~2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유스호스텔 겸 캠핑장이 있었다. 걸어갈 수 있겠다. 하루 밤도 아니고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하니 걸어가기로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가랑비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차도를 따라 좌우로 농지가 펼쳐져 있었다. 수풀 속에 들어가 노숙을 해야 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걸어가는 도중 간간히 승용차가 지나갔다. 마음은 승용차를 세워 근처 숙소가 있을만한 마을에 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또 호러 영화들의 장면이 떠올랐다. 차가 지나갈 때 밭고랑에 들어가 몸을 숨겨야 하나 고민했다. 절대로 연고 없고 갈 곳 없는 외지인으로 보이면 안 된다고 다짐했다.


드디어 호스텔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사람이 있었다. 잠잘 수 있는지 물었는데, 겨울에는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은 있는데 영업을 안 한다니. 사정을 이야기하고 방이 아니라 사무실 바닥 한편에서라도 자면 안 되겠냐 물었으나 안된다며 1킬로 정도 조금 더 내려가면 호텔이 하나 있을 거라 알려주었다. 영업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다고 한다.


다시 길을 걸었다. 반쯤 해탈한 상태였는데, 비가 살짝 이슬처럼 내리는 겨울이지만 엄청나게 춥지는 않아서 노숙을 해도 죽지는 않을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여기서 탈출하면 나도 돈 아끼지 말고 자동차를 렌트해서 마음껏 안전하고 안락하게 돌아다니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바로 그 동네, Hédé에 도착했다. 아주 작은 동네였고 산기슭 아래 호텔 겸 식당이 있었다. LE VIEUX MOULIN. 2층 건물이었는데 호텔보다는 식당으로 유명한 듯, 사람들이 차를 몰고 와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방이 있는지 물어봤다. 호텔 영업을 하기는 하는데 일요일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토요일 저녁에 모든 직원이 집에 간다고 했다. 하지만 특별히 내가 머물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월요일에 키를 현관 옆에 두고 나가라고 했다. 숙박비는 아마도 150유로 정도였던 것 같은데 명확하지는 않다. 당시에 내가 머물렀던 가장 호사스러운 호텔이었다. 이거 저거 따질 처지가 아니었던지라, 프랑스 호텔이 늘 그러듯 돈을 지불하기 전에 방을 확인해 보라고 하는 것이 참 새삼스러웠다. 방은 참 정갈하고 넓었다. 욕실도 무척 넓었는데, 세면대처럼 생긴 수동 비데가 있어서 신기했다. 늘 기차역 가장 가까운, 매트리스 스프링이 그대로 느껴지는, 간이 사워부스가 설치된 호텔에만 머무르다가 여기서 처음으로 프랑스식 안락함을 느꼈다.


토요일 아침 일찍 언덕 위에 있는 작은 마을로 올라갔다. 당연히, 빵집이 열려 있었다. 마을 전체가 휴업 중이라도 프랑스 빵집은 적어도 토요일까지는 당신을 먹여 살리리니! 월요일까지 먹을 빵을 샀다. 프랑스 국민빵 바게트와 칼로리 보충을 위한 뺑오쇼콜라.


점심은 호텔 식당으로 갔다. 식당 종업원이 예약하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다고 했는데, 처음에 나를 받아준 지배인 여성이 뭐라 뭐라 말하더니 들여보내 주었다. 호텔 숙박객이라고 말해준 듯했다. 고마웠다. 다들 차려입고 식사하러 온 와중에 허름한 배낭여행객이라, 반쯤 자격지심에, 들여보내준 은혜에 보답하고자, 그리고 이것이 내가 이번 주말에 먹을 수 있는 마지막 식사인지라, 돈 아끼지 않고 팍팍 쓰기로 했다. 생굴 요리를 전채로, 농어 스테이크와 디저트까지 시켰다. 음식은 역시 훌륭했고, 특히나 굴 전채가 참 기억에 남는다. 손님이 올 때마다 하얀색 테이블보를 펄럭이며 교체하는 참으로 프랑스다운 식당이었다.


저녁 해가 지고, 직원들이 짐을 싸고 떠나는 것을 방에서 창 밖으로 지켜보며 바게트 빵을 뜯어먹었다. 그들이 모두 떠난 뒤에 빈 호텔을 돌아다니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토요일 밤과 일요일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드디어 지나가는 첫 버스를 타고 탈출했다. 나오자마자 렌터카를 알아보았는데, 수동 차량 밖에 없어서 안락하고 호화로운 여행의 꿈은 바로 접었다.


당시 주말 내내 씹어먹던 기억 속의 프랑스 바게트는 참 맛있었다. 딱딱하지도 않았고, 특별한 맛이 아닌데도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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