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의 늪'에서 '바이브 코딩'의 시대로
법대를 다니거나 고시 공부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답안지 작성'이라는 혹독한 훈련을 거친다. 법학 답안은 여타 학문의 서술형 시험과는 결이 다르다. 핵심은 내용보다 '목차'에 있다. 논리적인 목차를 잡는 것이 답의 뼈대이며, 그 아래 붙는 설명은 그 뼈대를 보강하는 부가적인 장치일 뿐이다. 목차만 제대로 구성해도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막상 변호사가 되어 실무의 바다에 뛰어들면, 그 단단했던 목차 중심의 사고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현실은 교과서처럼 명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뢰인은 "이 말은 꼭 넣어달라"며 감정적인 호소를 쏟아내고, 변호사 자신도 이 법리도 쓰고 싶고 저 판례도 넣고 싶은 욕심에 사로잡힌다. 그러다 보면 문서는 어느새 중구난방이 된다. 무엇이 핵심인지,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모를 '잡탕 문서'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법률 문서를 쓸 때 내가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은 역시 목차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면 문득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일단 적어두고는, 이 문장을 어디에 끼워 넣어야 논리적일지 한참을 고민하곤 한다. 처음 계획했던 목차보다 더 나은 논리 구조가 생각나 전체 구성을 완전히 뒤엎는 일도 예사다. 결과적으로 글을 실제로 써 내려가는 시간만큼이나, 목차를 잡고 논리를 배치하는 '설계'의 시간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게 된다.
여기에 한국어 특유의 복잡함이 고통을 더한다. 주어와 술어의 호응을 맞추는 것은 기본이고, 조사 하나, 의존 명사 하나에 따라 문장의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진다. "대하여"라고 쓸 것인지, "관하여"라고 쓸 것인지와 같은 미세한 어휘 선택의 기로에서 변호사는 고독한 싸움을 벌인다. 법률가에게 단어는 곧 무기이기에 소홀히 할 수 없지만, 그 과정은 늘 고역이다.
AI를 업무에 본격적으로 활용하면서부터 이러한 고질적인 어려움들이 마법처럼 해결되기 시작했다. AI는 단순히 텍스트를 생성하는 도구를 넘어, 최고의 '논리 설계 파트너'가 되어준다.
우선 초안 작성을 맡기고, 그 구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시 "목차를 이런 순서로 바꿔달라"고 지시할 수 있다. 새로운 주장을 추가해 달라고 요청하면, 그 내용이 기존 논리 체계에 어긋나지 않도록 목차 전체를 다시 재구성해준다. 특히 '캔버스(Canvas)' 기능은 변호사들에게는 축복과도 같다. 문서의 흐름을 한눈에 보면서 특정 부분을 수정하고, 전체적인 구성을 실시간으로 조율할 수 있는 환경은 마치 숙련된 어시스턴트와 함께 화이트보드 앞에서 전략을 짜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AI를 업무에 광범위하게 적용한 이후, 내 삶에서 '야근'이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정확한 수치를 측정해보진 않았으나, 법률 문서 작성에 소요되는 시간이 이전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것을 체감한다. 물리적인 시간의 단축뿐 아니라, 글쓰기 과정에서 오는 심리적 압박감까지 해소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다.
여전히 많은 동료 변호사들이 AI 활용에 비판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불만은 대개 "몇 가지 재료를 넣고 돌려봤는데 결과물이 시원찮다"는 데 머물러 있다. 이는 AI의 본질을 오해한 결과다.
최근 개발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바이브 코딩(Vibe Coding)'이라는 말이 있다. 정교한 설계도 없이 AI와 대화하며 코드를 짜고 고치는 과정을 반복하는 방식이다. AI로 법률 문서를 만드는 과정도 이와 똑같다. 단 몇 줄의 프롬프트로 완벽한 서면이 뚝딱 나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AI 없이 글을 쓸 때 단번에 문서를 완성하지 않는다. 고치고 또 고치며,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지 않는가. AI와의 협업도 마찬가지다. AI가 던져준 초안을 토대로 변호사의 전문성을 더해 수정을 반복하며 최선의 결과물을 찾아가는 과정, 그 '상호작용' 자체가 현대 변호사의 새로운 글쓰기 방식이 되어야 한다.
AI는 변호사의 대체재가 아니라, 변호사를 '목차의 늪'과 '어휘의 감옥'에서 해방해주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도구를 다루는 법을 익히는 것은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