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민망한

by 평택변호사 오광균

서울에서의 재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기차 안, 스마트폰으로 전자소송 기록을 확인했다. 1년 넘게 끌어온 이혼 사건의 변론기일인데 상대방 방금 뭔가를 제출했다는 알람이 왔기 때문이었다. 지난 6개월간 단 한 장의 서면도 내지 않고 침묵을 지키던 상대방이 기일 당일인 오늘, 무려 20장이 넘는 '청구취지 및 원인 변경신청서'를 기습적으로 제출한 것이다.


처음 그 방대한 분량을 확인했을 때는 살짝 긴장감이 돌았다. 기일 당일에 장문의 서면을 던져 상대방의 대응력을 무너뜨리려는 전형적인 '기습 공격' 의도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수십 장의 서면을 훑어보기도 전에 나는 헛웃음과 함께 서류를 덮었다. 정독할 필요조차 없었다.


위자료와 재산분할 액수를 가사소송 사물관할 규칙에 따라 합산해보니, 이 사건은 사물관할 위반이어서 더 이상 현재 재판부에서 다룰 수 없는 사건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어차피 오늘 재판은 불필요한 것이다.


관할은 민사소송법 책을 펴면 거의 첫 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변호사 자격증이 있다면 모를 수가 없는, 아니 몰라서는 안 되는 법리다. 상대방은 우리를 당황하게 하려고 밤새 20장이 넘는 서류를 써 내려갔을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본인들이 낸 그 두꺼운 서류 때문에 오늘 재판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허를 찌르려던 기습 공격이 자기 발등을 찍는 자폭이 된 셈이다.


법정에 가보니 상대방 변호사 곁에 의뢰인 본인도 나란히 앉아 있었다. 굳이 당사자까지 출석시킨 걸 보니, 변호사는 본인이 낸 서면이 관할 위반이라는 사실을 정말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다. 알았다면 의뢰인을 이 헛걸음에 동참시키는 '사고'를 치지는 않았을 테니까.


판사도 법정에서 처음 그 서류를 보게 되었는데, 당연히 "관할 문제 때문에 오늘 기일은 연기하고 다음기일은 추정하겠습니다"라는 겨우 한 마디만 하고 재판을 끝냈다.


사실 그 로펌은 업계에서 나쁜 의미로 유명하다. 서면을 늘 마감 직전에, 혹은 오늘처럼 기일 당일에 기습적으로 내고는 상식 밖의 주장을 되풀이하기로 말이다. 아마 그쪽 의뢰인은 '우리 변호사가 이렇게 압도적인 분량으로 상대를 압박한다'고 든든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판사에게 읽히지도 못하고 재판부 재배당으로 사건을 지연시키는 서면은 그저 종이 뭉치에 불과하다. 의뢰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일 뿐, 결과적으로는 본인 의뢰인의 시간과 비용을 갉아먹는 무책임한 행위다.


상대방 변호사의 무능함이 짜증은 나지만, 사실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저 그 '멍청함'이 주는 답답함이 컸을 뿐이다.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20장의 서류를 준비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관할권조차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짜증보다는 측은함과 황당함이 앞섰다.


1년 넘게 끌어온 이 사건은 상대방 덕분에 이제 내년 여름에나 끝이 나겠다 싶다. 겨울의 초입에서 여름의 끝을 기약해야 하는 의뢰인의 처지가 안타깝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최소한 나는 내 의뢰인에게 '기본도 모르는 변호사'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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