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기게 해 주는 귀인을 만나다
땅과 관계된 소송이었다.
증거 중에 우리 쪽(원고)에서 제출한 서류가 있었는데 워낙 오래전에 작성된 것이라 어디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고, 누가 작성한 것인지도 모를 서류였다. 의뢰인은 상대방(피고) 대표자나 총무가 작성한 서류라고 하고 정황상 의뢰인의 말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사실 피고가 아니라고 하면 딱히 맞다고 증명할 방법도 없는 상황이었다.
재판에 들어가기 전에 의뢰인에게 전화하여, 피고가 아마 부인할 것 같고, 어차피 다투는 내용은 감정신청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돈이 좀 들더라도 감정을 신청해보자고 권하였고, 의뢰인도 동의하였다.
막상 기일에 변론 기일이 되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판사 : 피고, 지난 기일에 오늘 갑 제 OO호증 인부하기로 했는데, 어떻게 하실 건가요?
(해석 : 지난 재판일에 원고에서 제출한 증거 하나에 대해서 피고가 인정할 것인지 아닐 것인지를 결정해서 의견을 주기로 했는데, 어떤 의견인가?)
피고 : 아, 그게...
판사 : 부지로 정리하면 될까요?
(해석 : '피고는 모르는 서류다'라고 한 것으로 알면 되나?)
피고 : 피고의 이익으로 원용하겠습니다.
(해석 : 원고가 제출한 증거지만 피고에게 유리한 증거이니 피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로 사용하겠다)
대박이었다.
피고가 인용하겠다던 그 서류는 사실 피고가 '어디서 나온 서류인지 모르겠고 내용도 맞지 않는 것 같다'며 적극적으로 다투던 것이었는데, 피고 변호사는 판사가 말한 갑 OO호증이 어떤 서류 인지도 모르고, 그저 방청석에 관계자가 나와있으니 일반인은 알아듣기 어려운 아무 말이나 한 것 같았다.
판사는 의아해하면서도 피고 변호사가 그렇게 말하니 알겠다고 하면서, 특별히 더 할 것이 없으면 변론을 종결하겠다고 하였다. 다툼이 있었던 부분을 피고 변호사가 덜컥 인정해 버렸으니, 재판을 더 진행할 것도 없게 된 것이었다.(실제로는 피고가 추가로 알아보고 제출할 것이 있다고 하여 한 번 더 재판을 하기로 하였으나, 사실 피고가 알아보겠다는 것은 결론에 영향을 주는 내용은 아니었다)
나는 "OO 년에 OO 법에 의하면 등기를 할 때 A라는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A라는 서류가 없었으므로 등기는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을 하자, 피고는 "OO 년에 OO 법에 의하면 등기를 신청할 때 A라는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A라는 서류가 없었다. 그러므로 등기는 유효하다"라고 항변을 하였다.
"A이어야만 B인데, A가 아니니 B가 아니다."라는 주장에
"A이어야만 B인 것도 맞고, A가 아닌 것도 맞다. 그런데 B다"라는 항변을 한 것이다.
내가 "당초 토지는 a, b, c, d의 공동소유였는데, a, b, c의 지분 소유권만 이전등기가 되어 d의 지분이 누락되었고, 누락된 지분이 등기되지 않은 채 지분 전체에 대해 피고에게로 소유권 이전등기가 되었으니 잘못된 등기이다'라고 주장하자, 상대방 변호사는 "d의 지분은 일부러 누락시켰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d의 지분이 누락된 것은 피고도 인정하였고, 현재 피고가 지분 전체의 소유자로 등기되어 있으니, 피고도 등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변호사가 현재 토지의 소유관계조차 확인하지 않고 그저 상대방의 주장에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하다 보니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셈이다.
사실 위 사건에서 변호사법상 피고 변호사에게는 수임이 금지되는 경우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변호사에게 대리권이 있는지는 법원에서 직권으로 판단할 수 있지만, 사실 상대방이 지적하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다.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피고 변호사에게 대리권이 없다고 주장을 하면 피고는 다른 변호사를 선임할 것이 분명한데, 지금 변호사가 너무 못하기 때문에 내 의뢰인인 원고에게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대학원 동기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지금 하고 있는 사건이 있는데, 상대방 변호사가 변호사법 위반이라 대리권이 없거든. 근데 너무 못해서 그냥 그분이 계속했으면 좋겠어. 대리권을 지적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러자 동기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귀인이여. 잘해 드려"
그 말을 듣고 나는 피고 변호사에게 대리권이 없다고 이미 써 놓았던 서면을 바로 삭제했다.
생각해보니 그분이 아니었다면 사건이 이렇게 우리 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사실 의뢰인과 첫 상담을 했을 때에도 승소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본 사건이었다. 그래서 패소를 대비하여 처음에는 청구금액을 낮추어 청구했다가, 소송 도중에 승소 가능성이 높아 보여 청구금액을 많이 늘렸다.
소송을 저렇게 대충 해도 돈을 주고 맡기는 사람도 있는데, 허위 광고를 안 하고, 상담 때 안 될 사건은 안된다고 단호하고 말했더니, 다른 곳에서는 된다고 했다며 사건을 맡기질 않으니, 참 사무실 유지하며 세상 살아가기가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