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챌린저스> 리뷰 3.음악
* 본 리뷰는 영화<챌린저스>의 결말을 담고 있습니다.
*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sosorap/96
아트는 자기 성찰적 서사가 없고 타인의 서사를 끌어와 자아의 공백을 메우는 인물이다. 패트릭으로부터 그의 성공적 서사를 끌어왔었지만 그가 자신을 떠나자 아트의 자아는 부서진다(demolished). 패트릭이 아트와의 관계에 돌아오려면 패트릭은 다시 아트의 빈 곳을 채울 수 있는 '보증'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아트의 자아는 타시의 서사가 채우고 있어 패트릭은 들어갈 곳이 없다.
David Bowie - Time Will Crawl
https://youtu.be/QTdA6MtroUY?si=93uiILqIV5_-xBUD
I've never sailed on a sea
나는 한 번도 바다를 항해해본 적이 없어
I would not challenge a giant
난 거인에게 도전하지도 않겠지(아트가 사진을 찍는 타시를 본다)
I could not take on the church
난 교회에 맞설 수 없을 거야(카메라에 패트릭이 비친다)
Time will crawl 'Til the 21st century lose
내가 꿈꾸던 미래가 무너질 때까지 나는 멈춰있겠지
I know a government man He was as blind as the moon
나는 주어진 것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야 달처럼 스스로 빛나지 못하지
He saw the sun in the night
나는 스스로 빛나는 인간을 보았어
He took a top-gun pilot
나는 그를 조종사로 데려왔어 (나라는 비행기에 태울거야)
He made him fly through a hole 'Til he grew real old
그리고 그는 나를 그가 가고픈 방향으로만 몰아넣었어 아주 오랜 시간동안
And he never came down He just flew 'til he burst
나는 죽을 때까지 나자신으로 돌아오지 못했지
(나는 터질 때까지 나자신을 소모한 후에야 나자신으로 돌아오는 법을 배웠지)
* 보위의 곡은 권력에 소모당하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자조적이고 비판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나는 이 곡이 아트의 시선, 아트의 자아정체성을 반영하는 곡으로 보아 영화에 맞춰서 의역해보았다.
스스로 항해하지 못하는 아트는 패트릭이라는 대체서사가 무너지고 난 후, 타시라는 탑건파일럿을 자신의 자아에 데려다 두었다. 아트는 타시의 자아를 따라 서브 속도를 올리고, 음식을 바꾸고 몸을 키운다. 그리고 타시가 얻었어야 할 성공-우승, 광고, 그의 이름으로 된 재단 등-을 하나하나 따내어 간다.
둘이 결혼한지 8년이 지나고 아트는 정상의 자리에 올라있다. US오픈에서 우승하면 그는 커리어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 -패트릭은 부정하지만- '위대한 선수'의 반열에 오르기 직전이다. 그의 얼굴을 내세운 광고도 있고 재단도 있다. 여신같이 빛나던 거인- 타시도 그의 곁에서 그의 일을 돕고 타시와의 결혼생활에서 얻은 귀여운 딸도 잘 자라고 있다. 딸이 좋아하는 호텔의 탑층의 펜트하우스를 빌리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13년 전 패트릭의 노래에서 그려진 '성공'의 모습을, 아트는 하나도 빠짐없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한복판의 아트는 텅비어 보인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같다. 타시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알아'라는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고 어깨수술을 마친 후에 부진은 '슬럼프'라는 소식으로 뉴스에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알려주고 있다. 그 속에서 올해 좀 부진한 한 테니스선수가 하는 말이 "I'm rusty(난 녹슬었어)"다. 30년동안 테니스 쉰 노인이 다시 삐걱대며 테니스라켓을 쥔 것도 아니고 한창 때의 30대 선수가 1년 정도 부진했다고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그러니까, 녹슨 것은 그의 실력이 아니고, 타시가 모는 비행기로서의 아트다. 그의 자아정체성이다.
변화하는 사회에서 자아를 유지하려면 변화에 '반응하는' 자아의 성찰이 필요하다. 자아는 끊임없이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구조가 주는 제한을 알고 그 제한 속에서 자아가 원하는 것(가능한 것)을 찾아 자신의 네러티브를 이어나가야 한다. 스스로의 욕망을 알고 직시하는 것은 그래서, 자아정체성을 유지하는 근간 중에 근간이다.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대로 나아가야 욕망이 부딪히는 한계(구조)도 알고, 또는 욕망이 해소 가능한 영역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의 흔적이 성찰에서 나오는 자기서사임에다.*
하지만 아트는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지 않는다. 그 욕망에는 금기가 있고 그 금기를 넘어서기에 자신은 충분히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다. 우연히 욕망이 자신의 눈에 보였을 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되고 싶은 자아였던 패트릭이 '욕망의 대상'이 되면서 동시에 아트는 자신의 자아를 잃은 채 버려졌었다.
아트의 첫번째 대체서사가 욕망의 대상이 되면서 금기에 맞설 용기가 충분하지 않은 그의 자아는 무너지고 아트에게 이것은 '욕망'이 만든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 다음의 대체서사인 타시를 받아들이고는 다시는 자신의 욕망을 마주할 생각이 없었던 것. 하지만 아트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주변의 기대와 타시의 욕망으로 구성된 현재의 자아정체성과 아트 사이에 균열을 만든다. 균열에서 끊임없이 비집고 나오는 존재론적 불안. 자신의 삶 속에 정작 자기 자신은 없다는 감각이다.
아트의 욕망은 대체서사에 균열을 만들고 끝내 그를 어디로 이끌어갈까?
2025.10.28
숨은 자아찾기 Let's go
* 문단 내용 참고: 앤소니기든스, [현대성과 자아정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