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지 않고 주사위를 던지자는 40대 직장인의 다짐
※ 소소의 배우자(일명 곰)가 쓴 글로, 소소와 비슷한 듯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적은 글입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양자론의 불확실성을 인정할 수 없었고 그런 말을 남겼다. 과연 주사위는 불확실한가?
소소가 투자로 돈을 점점 불려 나가고 있는 지인의 이야기를 해줬다. 우리의 널브러짐을 반성해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였다. 백번 천 번 인정하고 반성해야 하는 이야기다. 잠시 참회의 시간을 가진 나는, 그동안 속이 상해 열어보지 않았던 MTS를 슬쩍 열어봤다. 그리고는 최근 코스피 상승과 걸맞지 않게 파랗게 질린 내 보유종목을 보고 조용히 창을 닫았다.
이건 손절하기에도 너무 늦었다. 그리곤 탈출할 수 있는 확률에 대해 생각해 봤다.
어느 정도 객관화된 지표나 전망이 연관이야 있겠지만, 주식 등 인간 심리가 크게 작용하는 투자시장은 사실 주사위 놀이와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나야 수많은 눈물개미 가운데 하나지만, 심지어 그 유명한 아이작 뉴턴도 남해거품에 휘말려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라면서 눈물의 손 털기를 했다고 하지 않는가?
이렇게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소의 지인처럼 승승장구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상록수처럼 언제나 파랗기만 한 창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문득 의문이 든다. 과연 내가 굴리는 주사위는 불확실한가?
정육면체에 중심이 가운데 있는 물체를 동일한 환경에서 무수히 많이 굴리면 굴릴수록 어느 한 면이 위를 향할 확률은 1/6로 수렴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동일한 환경에서 하나의 주사위만 던지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세상 무엇보다 공정한 것처럼 보이는 주사위도 두 개 이상을 던지면 경향이 생긴다. 각 주사위의 어느 면이 나올 확률을 똑같이 1/6이지만, 두 주사위가 얽히면 많이 나오는 수가 생기게 된다. 두 개의 주사위를 던졌을 때 나오는 합은 2부터 12까지의 범위다. 합이 2인 경우는 1가지 조합으로 확률은 1/36이며, 3인 경우는 2가지 조합으로 2/36이다. 이때 7이 될 수 있는 경우가 6가지 조합으로 6/36의 확률을 가진다. 주사위가 하나일 때는 의미가 없지만, 두 개 이상이 되면 관계가 생기고, 관계에서 의미가 생기며, 의미는 경향을 동반한다. 이는 반드시 관찰자가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예컨대 어느 관찰자가 두 주사위를 던지며 두 주사위의 차에 의미를 둘 경우 가장 많이 나오는 숫자는 10가지 조합의 결과로 나오는 1이 될 것이다.
2개 주사위를 던지면, 두 주사위가 엮여 의미를 만든다. 양자도 두 개가 서로 얽히며 관계를 만든다. 양자론에서는 특정 물리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고 한다. 측정 자체가 영향을 주기 때문에 위치를 측정하면 운동량이 불확실해지고, 운동량을 측정하면 위치가 불확실해진다고 한다. 양자 하나만 측정했을 때는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애매함만 남는다. 마치 하나의 주사위를 던졌을 때와 같이. 그런 세계는 아인슈타인이 인정할 수 없었던 것처럼 혼돈만이 가득하다. 유명한 미드인 ‘빅뱅이론’에서 나오는 ‘이과 유머’처럼 의자가 갑자기 미녀가 된다거나 할 수 있는 세상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은 모든 것이 얽힌 상태기 때문이다. 한 개의 주사위를 던졌을 때는 무작위의 혼돈만 존재하지만, 두 개 이상의 주사위를 던졌을 때는 경향성이 생긴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주사위를 던지면 ‘반드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예측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 경향성이 바로 우리의 삶을 예측 가능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게 만든다.
양자 얽힘이라는 현상이 있다. 두 입자가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연결이 유지되며 한 입자에 행해지는 작용이 다른 입자에도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뜻한다. 만약 양자 얽힘 상태에 있는 한 쌍의 양자가 스핀이 서로 반대일 때, 측정하기 전에는 두 입자의 상태를 알 수 없으나, 어느 한쪽의 양자를 측정하는 순간, 다른 쪽의 양자 상태를 특정할 수 있게 된다. 양자 하나를 측정하기는 어렵지만, 얽힌 양자가 있다면 어느 한쪽만 측정함으로써 다른 한쪽의 상태를 알 수 있게 된다. 소소의 기분이 저기압일 때, 내 기분도 따라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이해했다. 소소의 상태를 알면, 내 상태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테니.
우리 삶은 늘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같다. 그리고 우리는 한 번 굴린 주사위의 결과를 보고 일희일비하기도 한다. 하지만 앞의 이야기에 비추어보면 한 번 굴린 주사위가 갖는 의미는 미미하다. 살면서 마주하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마다 우리는 주사위를 굴린다.
“오 분만 더 누워있을까?”
“오늘만 운동을 쉴까?”
“쇼츠 한 개만 더 볼까?”
“공부는 내일부터 할까?”
“오늘 마지막으로 배달 음식을 시킬까?”
수많은 순간에서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겨우 한 번 던진 주사위 결과를 붙잡고 실망하거나 비관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앞으로도 수많은 주사위를 던질 테고, 단지 마음속에 어디로 향하고 싶은지를 되뇌며 고삐를 놓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무수히 던지고 던지다 보면, 분명 쥐고 있는 고삐에 영향을 받은 주사위는 어떤 경향성을 띠게 될 테다. 그리고 그 경향성은 우리가 쥐고 있는 고삐와 무관하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어느새 돌아보니 한 거 없이 나이를 먹었다. 이룬 것 없는 현재를 보며 왈칵 두려움이 몰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10년 전을 생각하면 그렇듯이, 앞으로 10년 후에 지금을 생각하면 뭐라도 할 수 있는 좋은 시절로 기억하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 던지는 주사위 하나하나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주사위 하나하나에 미혹되지 않고 그저 마음속 고삐를 단단히 쥐고 주어진 주사위를 담담히 던져야겠다.
아인슈타인이 한 말에 대한 닐스 보어의 답은 “신이 주사위로 뭘 하든 상관하지 말라”였다.
그렇다. 사람은 신을 본떠 만들어졌다고 하지 않았나. 사람이 주사위로 뭘 하든 끝까지 지켜보지 않고서는 왈가왈부할 필요 없다. 불확실해 보이지만, 그건 다 던져보지 않고는 모른다. 신도 한 번의 주사위로 모든 걸 이루지 않았다. 던질수록 확실해진다.
나를 포함해 점점 주사위 던지기에 지쳐가는 이들이 조금 더 힘을 냈으면 좋겠다. 지금은 불확실해 보여도, 분명 언젠가는 확실해지는 순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