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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는 건 호구나 하는 짓이니까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태도

by 소소 쌤

중학교 1학년 담임으로 살아가면서 요즘 학교에서 아이들 사이의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은 이유가 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이렇다.


A 야, 시끄러워. (지적)

B 어쩌라고. 너도 지금까지 떠들었잖아. (반박)

A 아가리 닥치라고. (거친 표현)

B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무시)


A는 자신이 정당하다. B가 떠들었기 때문에 자신은 조용히 하라고 한 것이며, B가 이 정당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가 난다.

B 또한 자신이 정당하다. 여태까지 떠든 사람이 나한테 명령하는 건 어이없는 행동이다. 자기가 선생님도 아닌데 나서는 주제에 A는 나쁜 말까지 사용했다. 화가 난다.

A와 B는 상대가 잘못한 부분을 콕 집어 나에게 찾아와 하소연한다. 자신은 정당한데, 타인이 잘못을 했다면서 씩씩댄다. 상대를 혼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온 것인데 들어보면 항상 쌍방이다.


나는 양쪽 다 잘못이 있고, 양쪽 다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로의 입장을 정리해 주고, 각자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면 아이들의 표정은 뾰로통하다. 그 뾰로통한 이유를 물으면, 결국 도돌이표가 된다.


제가 왜 다 참아요?

쟤는 (사과를 하긴 했는데) 진심으로 안 했어요.

저는 쟤 행동이 불편한데요?

제가 기분 상한 건 어떻게 해요?


실제 아이들이 했던 말들이다. 그렇게 도돌이표를 하고 있자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그러는 너는 뭘 그렇게 잘했냐?”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충동이 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은 삼킨다. 어차피 돌아올 반응 또한 뻔하다.


저도 제가 잘못한 건 아는데요, 근데 쟤가 더 잘못했잖아요.


하아,

나는 이 제자리 논쟁을 매주 1회 이상 해오고 있다. 아이들은 해결 방안도 없이, '상대에 대한 불만 말하기'에 몰입해 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자신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과정에는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기’도 없고, ‘공동체를 위해 노력하기’ 같은 것도 없다. '애들이니까, 그래, 애들이니까 그렇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어르고 달래며 한 학기를 보냈다.

(물론 서로를 이해하고 참고 노력하는 예쁜 아이들이 다수다. 놀랍게도 자신이 문제 행동을 하는 몇몇 아이들이 서로 저런 상황을 만들고 저 논리로 싸운다.)


그런데 이것이 아이들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이혼 숙려 캠프를 즐겨 보는 편이다. 남의 부부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열심히 보나 싶을 텐데, 이해 못 할 수많은 사람들의 사례를 보면서 미리 예방주사를 맞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 프로그램으로 인해 실제 거울치료를 당하거나, 우리 부부는 좀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혼율이 줄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프로그램을 보면, 우리 아이들 같은 부부가 참 많다. 분명 본인도 말과 행동에 문제가 있으면서, 끊임없이 본인은 이유가 있어 정당하고 배우자가 잘못했다고 비난한다. 그래서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못한다. 서장훈이 답답해하며 친절하게 문제를 설명해 줘도 납득하지 못한다.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억울하다고 말한다.

내가 '내 감정, 내 상황, 내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런데 혼자 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고,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했으며, 그래서 나는 정당하다고 말했다면, 타인도 어떤 감정을 느꼈고, 어떤 상황이라 이렇게 행동했으며, 그래서 본인이 정당하다고 느끼는지 들어야 한다. 한 발자국씩 물러나 서로의 정당함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어느 정도 참고, 어느 정도에서 해결방안을 타협해야 함께 살아갈 방도가 생긴다. 사실, 나도 이게 언제나 잘 되는 것은 아니지만(특히 부부싸움), 그럼에도 이게 아니고서는 결국 자기 말만 되풀이할 뿐 아닌가.

“함께 살아가야 하니까. 그럼 방법을 찾아야지, 어쩌겠니?”

애들한테 갈등을 마무리할 때마다 하는 말이다. 어떤 자기 방어기제로 인해 자신의 잘못은 작게 반성하고, 자신이 입은 피해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타인을 크게 지적하며, 호락호락한 인간이 되지 않으려 애쓰는 방식은 함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평소에 날 것의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는 편이다. 운전을 하면서, 불친절한 식당에서, 몸이 부딪히는 인파 속에서 불편함을 겪으면 그것을 반드시 터트리는 사람이 있다. 다른 이들이 참고 넘어가고 있는 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겪은 불편함을 분노로 표출하고, 상대를 공격한다. 상대가 잘못했으니까 화를 내는 건 정당하다고 여긴다. 요즘 세상이 민원 천국이 된 이유도 이것의 연장선 아닐까.


뉴스를 틀어도 이런 사람들이 자주 보인다. 명확히 잘못된 행동을 해놓고서도 자신은 정당했다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상대가 나한테 한 행동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상대가 잘못한 것이다. 나는 억울하다. 우긴다. 이런 모습을 우리 아이들에게 매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너그러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자신의 상처가 아파 타인을 꼬챙이로 쿡쿡 찔러대면, 그 타인은 또 자신을 보호하려 또 다른 타인을 쿡쿡 찔러댄다.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찌르는 사회에서 그 누가 행복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자신이 아픈 걸 알면, 타인도 똑같이 아플 것이라 여겨 조심해야 한다. 타인이 찌른 상처를 보고 나도 똑같이 찌르는 선택을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찌르는 것이 잘못된 것을 알고 다르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호구여서 참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려고 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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