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에서 벗어나는 법
마흔에 들어서기 위한 홍역을 호되게 겪고 있는 느낌이다. 지금 겪고 있는 무기력함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본다. 번아웃, 삼재, 아홉수 그런 것들. 설명해 보려 하고, 벗어나 보려고도 하는데 결국 다시 소파, 침대로 도망친다. 히키코모리들이 요즘 그렇게 이해가 된다. 무기력은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어난 안전지대처럼 느껴진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피곤하고, 세상은 내게 버거운 것들을 요구한다. 그렇게 좋아하던 여행도, 책도 고되게만 느껴진다. 그동안 안간힘을 써온 일들이 무슨 의미를 갖지는 모르겠고, 앞으로 나의 미래에는 도통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 않다. 지치는 일만 가득이다.
올해를 시작하며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유독 힘들었던 지난해 담임을 마치면서도, 난 활기가 있었다. ‘새해 계획도 세우고 미뤄둔 책도, 영화도 봐야지’라며 나름 즐겁게 방학을 계획했다. 그런데 방학 한 주만에 견디기 힘든 어떤 사건을 겪은 이후, 일주일 정도 침대 위에서 끙끙 앓았다. 보이지 않는 정신적 충격은 몸으로 나타났다. 미열이 지속됐고, 입술과 코에 물집이 잡혔다. 수시로 눈물이 났고 어두운 복도를 향해 걷지 못했다. 괜찮아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일주일 정도는 나를 내버려 두었다. 하루하루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조급증 내는 인간임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런데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바삐 움직여야만 된다고 생각했던 세상은 멀쩡히 돌아갔다. 이후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이 상태가 습관이 될 것 같은 두려움에 외출을 시도했다. 일상으로 돌아오려 했다. 그런데 일상은 예전의 일상이 아니었다. 나는 작은 스트레스에도, 작은 피로감에도 소파나 침대를 찾았다. 눈을 감고 세상으로 단절되어 잠으로 빠져들면 안전한 느낌이 들었다. 과하게 자고 일어나면 느껴지던 죄책감도 애써 무시했다. 좋아하는 커피도 혹시나 잠으로 도망칠 때 방해될까 봐 일부러 먹지 않았다. 내가 불면증이 없다는 사실만이 감사했다.
사지 멀쩡한, 한창 활동할 나이 마흔에 이 무슨 배부른 투정인가 싶기도 하다. 먹고 살 당장의 걱정이 없으니까 할 수 있는 호사일 수도 있다. 애가 있거나, 책임질 것들이 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진짜 힘든 일을 겪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참 유약하다 싶을 때도 있고. 나이 마흔이 되어서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책임질 경제력도, 체력도, 정신력도 갖지 못한 인간이라는 게 참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런 이성적인 생각으로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또 숨고 싶었다. 잠 속으로.
그 무기력 속에서 일부러 듣기 시작한 수업이 있다. ‘삶의 질문에 문학으로 답하다’
이 수업에서 다룬 첫 책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기독교적 색채가 가득한 책이다. 천사 미카엘이 하나님의 벌을 받아 세상에 내려와 3가지 질문에 답을 할 때까지 머문다. 구두 수선공 시몬의 곁에서 미카엘은 ‘사람 마음에는 사랑이 있고,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사람은 타인을 돌보는 사랑의 힘으로 살아간다’는 답을 찾게 된다.
사랑에 대한 책을 한동안 피했었다. 사랑의 진부함. 뭐만 하면 사랑을 편리한 답처럼 내놓는 것이 불편했다.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세상이 망가지는데도, 그저 사랑이 답이라고 말하는 것. 보이지 않는 사랑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것처럼 여기는 것이 싫었다. 사랑은 믿음의 강요 위에 아슬아슬하게 존재하는 허상 같았고,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행해지는 폭력과 거짓도 싫었다. 그런데 이 책은 또다시 사랑을 말하고 있다.
얼마 전 TV프로 ‘극한 84’를 아껴두다가 한 번에 몰아보았다. 기안 84가 나오는 프로그램들은 특별할 게 없는데 재밌었다. ‘극한 84’는 만화가 기안 84가 세계 3대 이색 마라톤을 뛰는 모습을 보여준다. 남아공 마라톤, 프랑스 메독 마라톤, 북극 마라톤은 각기 다른 자연환경을 보여주면서 42.195km를 뛰는 과정을 그린다. 기안 84는 애쓰며 훈련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힘들고, 매번 한계를 느끼고, 매번 구토를 하며, 매번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해 자책한다. 누가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니고, 한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도중에 멈춘다고 대단히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며 달리는가. 5시간씩, 7시간씩 걸려 완주를 하고 나면 도대체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한계라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기안 84와 러너들이 하는 말이 있다. 함께 뛰고 있는 사람들 생각이 났다고. 그들과 함께 연습한 시간을 떠올리고, 어디선가 자신처럼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한 걸음씩 내딛고 있을 그들을 떠올리고, 집에서 응원하고 있을 누군가를 떠올렸다고. 그러면서 그들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한걸음을 더 내딛고, 또 한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그들이 끝까지 해내고 나면 나는 울컥했다. 그들이 참 멋졌다.
문득 엄마의 잔소리도 떠오른다. 엄마는 항상 내게 자기 자신이 1순위여야 한다고, 그 누구보다 자신을 챙기라고 잔소리를 한다. 잔소리는 언제나 별로여서 알겠어, 알겠어. 하면서 흘려버리지만 엄마가 스스로를 그렇게 잘 챙기고 있으면 다행이라 여겼다. 그런데 엄마의 말과 행동은 달랐다. 복숭아 뼈에 철심을 박고 걷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냄새나는 음식 좀 하지 말라는 아빠의 투덜거림을 감수하면서도, 엄마는 자식들을 위한 요리를 했다. 자기 자신이 1순위면, 누구보다 자신을 챙겨야 한다면, 자신을 위한 요리를 멋지게 해서 잘 챙겨 먹지. 왜 그렇게 자식들 먹이는데 애를 쓰는지. 나는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길게 내려온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는 그것으로 살았다. 복숭아 뼈 수술 이후 우울했던 엄마는 우리보다 더 예쁜 첫 손주를 돌보러 왕복 3시간을 들여 동생 집에 다니면서 또다른 생기를 얻었다.
그러고 보니 나 또한 무기력한 그 와중에도 남편의 끼니를 챙겼다. 내가 쉬는 동안 혼자 출퇴근 4시간의 직장생활을 감당하고 있는 그가 안쓰럽기도 하고, 돕고 싶기도 했다. 내가 먹을 음식은 대충 아무거나 꺼내, 아무렇게나 담아 먹다가도 남편이 오는 시간이 되면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요리를 했다. 그가 기뻐하는 게 좋은 건지, 그 기뻐하는 과정에서 내 노고를 칭찬해 주는 게 좋은 건지. 내가 일을 하고 남편이 쉬던 작년에도 그랬다. 남편은 내 아침과 점심 도시락을 챙기고 나면 한참을 늘어져 쉬다가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몸을 일으켜 파스타를 만들어줬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는 한없이 게으르다가도, 서로를 챙길 때에 부지런히 정성을 다했다.
움직일 때, 정성을 다할 때, 고통에서 벗어날 때 그곳에 있는 것이 사랑인가 생각하게 된다. 뭐 대단히 목숨 바치는 숭고한 사랑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위한 '정성'과 '챙김'이 톨스토이가 말하는 사랑 같다는 생각을 한다. 기안 84나, 엄마나, 나도 그런 것들로 한걸음을 내딛고, 또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적고 나니, 나의 이 상태가 가짜 무기력 같기도 하고, 그냥 회피하고 싶은 무책임한 어른의 핑계 같기도 하다. 더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지나고 있을 수많은 사람이 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응석 부리고 툭툭 털고 진짜 일상으로 돌아와, 계획을 세우고 사람을 만나고 움직이는 게 옳다. 알고 있음에도 나는 좀 더 나를 내버려 두고 싶다. 톨스톨이가 말하듯 사람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니 거창한 미래 계획으로 당장 나를 움직이라고 독촉하기보다 ‘챙김’이라는 형태의 사랑으로 나를, 그리고 내 주변을 안아주며 당분간은 좀 천천히 회복해보고자 한다. 그 시간의 끝에는 좀 더 나은 사십 대의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