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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럼 Apr 28. 2016

영화 동주- 시대정신과 개인의 욕망이 충돌할 때

영화 동주 - 시대정신과 개인의 욕망이 충돌할 때


윤동주는 한일합병 후인 1917년에 태어나 광복되기 6개월 전 1945년 2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애는 일제 강점기 시절과 고스란히 겹쳐 있다.


그러나 윤동주의 일생은 겉으로 보기엔 일제의 폭압과 멀어 보인다. 북간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을 모르고 자랐고 신식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 연희전문대에 이어 일본에 유학을 가는 등 전형적인 엘리트 지식인 코스를 밟았다.


창씨개명을 했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한적도 없다. 하지만 우린 그를 일제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견디며 살다 간 시인으로 기억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수많은 예술가들이 애국 혹은 친일이란 꼬리표가 붙어 자신의 예술세계를 평가받지만 윤동주는 생애 전부가 일제강점기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이란 서사로만 설명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영화 동주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독립이란 시대정신
영화는 송몽규란 인물을 통해 윤동주를 이야기한다. 이종사촌 사이인 두 인물은 문학에 대한 감수성을 공유하며 성장했지만 욕망의 방향은 갈라졌다. 일찍이 독립운동 활동을 해온 송몽규는 독립이란 시대정신을 개인의 욕망보다 앞에 놓았다. 이에 비해 윤동주는 일제 치하의 엄혹함 앞에서도 문학이란 욕망을 품고 살았다. 송몽규를 바라보며 윤동주가 느꼈을 양가감정, 즉 시대정신과 개인 욕망의 충돌이 이 영화가 가진 에너지다. 윤동주의 시는 바로 독립과 문학 사이의 경계에서 피어난 꽃이었음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윤동주는 적극적인 독립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조선말을 쓸 수 없고 나라를 잃어버린 아픔에 무기력한 자신을 문학에 담았다. 송몽규의 그림자같이 늘 그를 바라보지만 함께 걸어가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시에 담았다.


영화 동주는 바로 이 부끄러운 윤동주를 담는다. 부끄러운 그의 머리 위로 윤동주의 시를 읊는다. 시의 목소리를 이동시켜 윤동주와 하늘을 바라봄으로써 시가 가진 정서를 가장 영화적으로 표현한다.


작가로 회귀한 이준익의 발견 

칼라가 아닌 흑백으로 찍은 것은 시대미를 강조하는 것과 함께 고증의 디테일을 가려준다는 점에서도 좋은 선택으로 보인다. 자칫 통속적인 신파로 흐를뻔한 이야기를 잡아주는 균형감각도 돋보인다.


다만 영화를 보고 나면 윤동주보다 송몽규에 대해 더 궁금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윤동주란 인물이 가진 소극성 때문일 수도 강하늘의 연기 때문일 수도 혹은 그 둘 다 일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이 감독이 의도한 바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천만 관객을 동원한 상업영화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흥행의 늪으로 한번 지나면 돌아올 수 없을 줄 알았던 다리가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회귀할 수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반갑다.  영화 동주는 송몽규의 발견이자 이준익의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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