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포자
1994년 12월 요맘때, 수능 점수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던 때여서 교무실에 전화했다. 2학년 때 담임이었던 다른 반 선생님이 받았다. 선생님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또렷하게 성적을 불러 주었다. 모의고사 때보다 15점이나 더 받았다. 200점 만점이었으니 큰 점수였다. 생각보다 잘 나왔다고 기뻐했다. 선생님은 수학을 참 잘 봤다며 크게 웃었다. 멋쩍었다. 나는 수리영역 30문제에서 3개만 맞췄다. 3번까지는 풀었으니 찍은 답은 모조리 틀렸다.
수학 포기자가 된 건 초등학교 때부터다. 애초부터 흥미가 없었다. 그러니까 포기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다른 과목도 비슷하긴 했지만 유독 집중하지 못했다. 수업보다는 상상의 여행을 떠나거나 잡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책에 낙서하거나 만화를 그리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집중할 때라곤 선생님이 문제 풀 학생을 찾을 때뿐이었다.
아버지는 장남이자 외아들인 내게 거는 기대가 컸다. 교육열도 높았다. 아버지는 내 수준을 정확히 몰랐다. 나는 열등생이었다. 아버지의 착각 탓에 주산을 이삼 년 배웠다. 방학 때면 서울 큰집에서 수학 학원에 다녔다.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는 명문대에 다니던 사촌 형에게 과외를 받기도 했다. 수학을 배우기보다는 내 능력이 어느 수준인지 정확히 깨우친 시간이었다. 공식만 대입하면 되는 문제에서 조금만 바꿔도 풀지 못했다. 한마디로 수학적 재능은 빵점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한두 달은 효과가 있었다. 미리 배웠던 행렬이 나왔다. 수업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시간이 지나자 또 버릇이 도졌다. 몇 번 딴짓했더니 그다음부터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공부하려는 의지도 부족했다.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집에 오면 자기 바빴다. 시험 기간에 두세 시간 책 보는 게 다였다. 당연히 성적은 처참했다. 이대로면 지방 전문대도 못 갈 것 같았다.
2학년이 됐다. 어느 순간 이래선 안 되겠구나 싶었다. 부모님의 잔소리 때문도 다른 사람한테 자극 받은 것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생존 본능이었다. 아버지에게 집을 떠나겠다고 했다. 그리곤 혼자 짐을 싸서 독서실에 들어갔다. 책상 밑에서 서너 시간 자기를 일 년쯤 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3학년 때는 거의 턱걸이로 우수 반에 들어갔다. 조금 더하면 원하는 대학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발목을 잡은 건 수학이었다. 영어도 기초가 부족했지만, 단어를 엄청나게 외우고 문제를 많이 풀었더니, 반절 이상은 맞았다. 수학은 달랐다. 수업은 이해조차 할 수 없었다. 시험 보면 행렬 빼고는 풀 수 없는 암호 같았다. 수능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리영역 시간은 10분이면 충분했다. 나머지는 정성 들여 답만 적었다. 요행은 따르지 않았다. 다행히 언어영역을 거의 다 맞았고, 나머지 과목도 기대 이상으로 나왔다. 그렇게 2년간 속성으로 공부해서 지방 국립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
주말을 맞아 집에 왔다. 딸은 아내에게 혼나고 있었다. 수학 학습지 답을 베껴 쓰다 걸렸나 보다. 아내는 풀이만 봐도 아니까 속이지 말라고 다그쳤다. 아들과 달리 딸은 엄마에게 꾸지람을 많이 받는다. 가끔은 누굴 닮아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냐고 모진 말을 하기도 한다. 나는 모른 척 먼 산만 바라본다. 혜윤이에게는 미안하면서 동정심도 느껴진다. 아내에게 내 수능 이야기를 했더니 다행히 그만큼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란다.
아내는 아빠처럼 좋은 직장에 다니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딸을 다독인다. 나는 고개만 끄덕인다.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수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아빠처럼 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