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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Feb 14. 2021

두 번의 이사

두 번의 이사

토요일(2. 6.) 이른 새벽, 속이 쓰려 눈이 떠졌다. 방은 아직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몸을 뒤척이며, 어제 일을 더듬었다. 퇴근하고 7시쯤 관사 근처 횟집에 갔다. 큰방 형님의 송별식을 하려고 동료 네 명이 모였다. 형님은 집이 있는 여수로 가지만, 마냥 행복해하지는 않았다. 원하는 걸 이루지 못했다는 공허함, 무엇보다 사람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 년 동안 쌓인 감정을 두 시간여 만에 풀어낸다는 건 애초 무리였는지 모른다. 한숨과 웃음이 공존하던 술자리는 코로나 19 때문에 아홉 시가 되자 강제로 막을 내렸다. 우리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관사로 향했다. 편의점에서 산 맥주 여러 캔을 나눠 마신 후, 그날의 내 기억은 끊겨 버렸다.

7시가 넘어서자, 방에 햇살이 스며들었다. 오늘 할 일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숙취로 머리는 지끈거렸다. 타는 목은 시원한 물을, 쓰린 속은 따뜻한 국물을 찾았다. 형님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새로 생긴 무인점포에서 생수와 라면을 샀다. 이 공간에서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다. 더 맛있게 끓여 주고 싶었다. 우리는 라면 세 봉을 삶아 국물까지 깨끗이 비웠다. 간간이 대화가 오갔지만, 속 푸는 데 더 열중했다.

9시쯤 이삿짐센터 직원이 왔다. 방을 둘러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이라서 했을 걱정이 눈 녹듯 사라졌을 것이다. 가장 큰 짐은 ‘형님’이라는 농담이 반 이상은 진실이었다. 한 시간도 안 돼서 끝난 이사는 일 년간의 짧은 인천 생활을 보여주는 듯했다. 몇 달 전 사고로 폐차를 한 형님은 이삿짐 차를 타고 고향으로 떠났다. 씁쓸한 미소를 띠며 말이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골방에서 짐을 하나씩 옮겼다. 온종일 형광등을 켜야 하는 작은방과 달리 큰방은 벌써 햇볕이 가득했다. 가장 큰 자리를 차지했던 온열 매트부터 옮겼다. 그것을 드러내자 방바닥의 뜨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한겨울 추위에 떨었던 이유를 봄이 돼서야 안 것 같아 헛웃음이 났다. 내 방을 비좁게 만들었던 세간은 큰방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옷걸이에 걸려 있던 여름옷도 정리하고, 곳곳에 쌓인 먼지도 닦아 냈다. 꾸며놓고 보니 이제야 사람 사는 방 같았다. 12시가 돼서야 내 첫 번째 이사는 마무리됐다.

두 번째는 사무실 짐을 옮기는 일이다. 공교롭게 나는 그 형님의 자리로 가게 됐다. 먼저 내 책상을 정리했다. 일 년 동안 모아 놓은 폐지부터 갈았다. 한 번은 보겠지 하고 모아 놓았지만, 대부분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실내화와 허리디스크 교정기, 옷가지 등을 새 자리로 옮겼다. 사무실 끝에서 끝이라 멀게만 느껴졌다. 익숙지 않은 업무를 새로 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한몫했을 것이다. 형님의 흔적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당직을 서던 과장님이 나오셨다.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재밌게 일하자고 했다. 따뜻한 덕담이 고마웠지만 잘할 수 있을지 걱정부터 됐다.

지난 12월부터 1월까지 쉴 틈 없이 일했다. 모니터에 너무 집중해서인지 눈은 어두침침해졌다. 안과에 갔더니, 노화가 시작될 나이라고 했다. 고질병이었던 허리디스크는 더 심해졌다. 무절제한 생활로 살이 5kg이나 더 쪘으니 허리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알 메이르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에서 시시포스는 신을 모독한 벌로 평생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일을 반복한다. 온 힘을 다해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면, 이내 다시 굴러 내려가고, 그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가 다시 바위를 굴린다고 해도 그의 미래가 나아질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큰 벌 중 하나는 희망을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닐까?

다음 주부터는 발령 이후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된다. 처음 해 볼 뿐만 아니라 중요하고 부담되는 커다란 돌덩이 같은 일들이 쌓여 있다. 눈과 허리는 더 나빠질 것 같다. 다행인 것은 마음 맞는 여러 동료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온종일 햇볕이 가득 찬 보금자리도 생겼다. 내년 이맘때쯤 그 짐들을 정상에 놓고 웃으며 내려오고싶다. 그 노력만큼 더욱 성장해 있을 나를 기대해 본다. 올해 이루고 싶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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