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중학생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친구들과 서점에 있는데, 보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다. 첫 책 선물을 허투루 고를 순 없었다. 고민은 했지만, 결정은 쉬웠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담아둔 게 있어서다.
이 년 전쯤 글벗의 글을 읽었다. 배 타면서 읽은 책 이야기였다. 책을 자녀에게 유산으로 주고 싶다고까지 했다. '세상과 격리되어 바다란 창살에 갇힌 내 처지와 비슷했다.’라는 그의 문장은 내 호기심을 돋웠다. 나도 삼 년 넘게 배를 타서다. 선상 생활은 단조롭다. 때로는 한 달 가까이 수평선만 보인다. 가족과 친구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자발적으로 사회와 거리를 둔 징역살이였다. 지금은 가장 그리운 시절이기도 하다. 그 책을 고른 가장 큰 이유다.
집 책상에 아들이 사 온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놓여 있었다. 이 책은 저자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1988년까지 옥살이를 하면서 가족에게 쓴 편지를 묶은 산문집이다. 교도소하면 차갑고, 억압받는 형상이 먼저 떠오른다.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처럼 말이다. 예상과 달리 선생님의 글은 사람의 온기, 가족애, 자유만이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제수에게 쓴 <여름 징역살이> 를 여러 번 읽었다. 세상살이의 지혜뿐만 아니라 코로나 19를 이겨내는 방법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느낌을 온전히 전하려면 글의 일부를 소개하는 게 좋겠다.
--------------------------------------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여름 징역은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돌베게, 396쪽) ----------------------------------------
코로나 19가 창궐한 이유는 인간의 과도한 자연 개발과 파괴 행위, 그에 따른 기후 위기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라고한다. 이 질병의 대유행은 지구가 인류에게 내린 징벌같다. 우리는 가족과 친구도 만나거나, 여행도 가지 못한다. 마치 반 징역살이 같다.
인종, 종교, 지역을 향한 증오와 혐오만 한다면 이 벌을 다시 받을 수밖에 없다. 이 죄는 일부가 아니고 인류가 오랜 세월 행한 잘못이 누적돼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를 훼손만하던 삶을 반성하고 개선해야만 공존할 수 있다. 그 힘의 원동력은 이웃을 향한 배려와 사랑이다.
신영복 선생님은 '비 한 줄금 내리면 늦더위도 더는 버티지 못할 줄 알고 있으며, 머지않아 가을의 서운한 기운이 우리가 키워왔던 불행한 증오를 거두어가고 그 상처의 자리에서 이웃의 따뜻한 가슴을 깨닫게 해 줄 것을 알고 있다.' 라는 지혜를 주었다.
내 게으름 때문에 이 년 만에야 이 책을 읽게 됐다. 참 다행이다. 읽을 때마다 아들 생각이 날 것 아닌가. 아들이 스무 살이 되는 해, 이 책을 선물로 주고 싶다. 글벗의 예상처럼 "에이, 고작!"이라고 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