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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Jan 14. 2021

겨울나기

겨울나기


인천과 목포를 오가며 주말부부를 한 지도 일 년이 다 돼 간다. 지금 사는 데는 인하대학교 후문 근처 관사다. 룸메이트가 형이다 보니 자연스레 작은방을 쓴다. 책장과 의자, 텔레비전, 옷걸이밖에 둘 수 없는 좁은 공간이지만 내게는 큰 힘을 주는 곳이다. 아내가 들으면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가끔은 집보다 이곳이 더 편하다. 여기서는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근을 마치고 방에서 맥주 한 모금을 마시면 하루의 피로가 시원하게 사라진다. 쉬는 날에는 눈이 떠지면 일어나고, 종일 뒹굴거려도 된다. 넷플릭스를 보거나, 비디오 게임을 해도 간섭받지 않는다. 가끔은 몰입해서 글을 쓰거나 책도 읽는다. 고등학교 다닐 때 자취하며 느낀 자유를 마흔 중반이 돼서 다시 찾은 기분이랄까! 그렇다고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12월 말에 매서운 추위가 찾아왔다. 창틈을 메우고, 창문에 단열 시트를 붙이는 것으로는 동장군을 막지 못했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등은 따뜻하지만, 외풍 때문에 얼굴이 시리고 코가 맹맹했다. 새벽에는 찬 기운 때문에 온몸이 부들거렸다. 요즘 같은 때 감기라도 걸리면 민폐여서 난방 텐트를 샀다. 일인용인데도 방이 가득 찼다. 아늑하게 잘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여름은 모기장에서, 겨울은 난방 텐트에서 일 년 내내 캠핑하는 것 같은 신세가 처량해 헛웃음도 났다.

새해부터 인천에는 폭설이 쏟아지고 한파가 몰아쳤다. 퇴근하고 들어선 관사의 공기가 사뭇 달랐다. 보일러가 고장 난 것이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관사 전체가 마찬가지였다. 이것저것 만져 봤지만 내 실력으론 어림없었다. 얼른 포기하고 내복과 두꺼운 잠옷부터 챙겼다. 온열 매트를 40도까지 올리고 난방 텐트를 쳤다. 겨울바람에 익숙해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바깥의 찬 기운이 온전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더 큰 문제는 씻는 것이었다. 거울을 보니 세수만 하고 출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샤워기로 물을 뿌리니 머리가 어는 것 같았다. 조금 더 하면 깨질 것 같았다. 샴푸를 헹구는데,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정읍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어머니는 겨울 아침이 되면 가마솥에 물을 데웠다. 나를 깨끗이 씻겨 주던 따뜻한 손길과 향긋하면서도 부드러운 물이 그리웠다.

코로나 19가 빠르게 퍼지면서 재택근무가 많아졌다.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지만 아직 익숙하진 않다. 추위를 견뎌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큰일이다. 밖에 나가는 것도 꺼려질뿐더러 매번 바깥 음식을 먹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아침은 시리얼이나 삶은 달걀로 때운다. 점심은 햇반과 집에서 싸 온 김치로 해결한다. 김이라도 있으면 더욱 좋다. 저녁에는 종종 관사 앞 호프집에서 안주로 파는 삼천 원짜리 계란찜을 사 먹는다. 50대 남자 사장님이 만드는데, 한 끼 때우는 데는 최고다. 음식을 만드는 내내 요즘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면서 깻잎 김치를 조금 싸 준다. 돈 내미는 손이 부끄럽다. 갓 데운 밥, 계란찜은 추워서 그런지 김이 더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사장님의 정성이 담긴 잘 익은 깻잎까지 먹으니 온몸이 따뜻해진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추위에 더 약한 사람은 큰방을 쓰는 형님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던지 보일러를 손봤다. 파이프 사이에 공기와 물을 빼냈다. 그래도 안 되자 드라이기로 관을 30분쯤 녹였다. 스위치를 켜자 보일러가 힘차게 돌았다. 몇 시간이 지나자 방에는 온기가 가득 찼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샤워도 했다. 최명희의 <<혼불>> 은 눈 내리는 겨울밤, 따뜻한 방구석에서 읽어야 제맛이었다. 내 마흔네 번째 겨울은 또 그렇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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