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떠난 여름 휴가
4년 전, 강원도로 여름 휴가를 떠났다. 웅장한 천연 동굴과 광활한 동해에 반해 계획한 여행이었다. 양가 부모님을 모시자는 제안을 아내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목포에서 삼척까지는 7시간 넘게 걸렸다. 고된 여정이었지만, 누구 하나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밤늦게 숙소에 도착했다. 어른들은 손주들의 재롱에 웃음꽃을 피웠다. 그것만으로도 여독을 풀기에 충분했다. 나는 모처럼 제구실을 한 것 같아 뿌듯했다.
다음 날 새벽부터 굵은 비가 내렸다. 일찍 서둘러 대금굴에 가려고 예약한 도시 관광버스를 탔다. 안내사는 걱정했다. 동굴에 물이 불어나면 관람을 못 해서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서운했다. 이번 여행 목적의 반 이상은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대로 삼척 레일바이크를 타기로 했다. 다행히 비는 잦아들었다.
나는 정읍 부모님, 아들과 함께 자전거를 탔다. 어머니는 휴대 전화를 맡기라고 했다. 반바지에 넣어 둔 게 빠질 것 같아 불안했나 보다. 서너 번 재촉하자 나도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한 달 전에 산 스마트폰이다. 덤벙거려서 물건을 잘 잃어 버리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넓고 파란 바다를 보며 부모님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내리막길에서는 어머니도 신이 났는지 페달을 힘껏 굴렸다. 아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게 30분쯤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머니에게 전화기를 달라고 했다. 주머니를 이곳저곳 뒤지더니 당황했다. 어디선가 빠진 것이다. 아버지는 뭐하러 전화기를 달라고 했냐고 어머니를 나무랐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당연히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4km 레일 내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먼저 안내소에 신고했다. 관계자는 자전거를 굴리면서 물건을 종종 빠트린다고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찾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찾아보고 연락해 주겠다고 했다. 그때는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달리는 레일바이크에서 내려 물건을 주워 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도착한 장모님은 다 올 무렵 전화기가 떨어진 걸 봤다고 했다. 찾을 가능성은 더 높아진 것 같았다. 한 시간쯤 지나서 관계자에게 연락이 왔다. 없다는 것이다. 안 미더웠다. 내 것이 아니니 제대로 보지 않았을 거라 생각됐다. 나는 다시 레일바이크를 탔다. 내 기대는 종점이 가까워져 올수록 점점 사라졌다. 주웠다는 사람도 없었다. 전화를 수십 번 해도 받지 않았다. 짜증이 났다. 모든 사람에게 언짢은 기분을 드러냈다.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또 나무랐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표정은 숨길 수가 없었다. 내 좁은 속이 드러나고 있었다.
아내는 스마트폰을 찾기 시작했다. 컴퓨터에 접속했다. 다행히 화면 보호기를 설정해 놔서 배터리가 떨어지지 않으면 전원을 끌 수는 없었다. 전화기도 새것이라서 이틀쯤은 끄떡없었다. 위치가 떴다. 작년 휴가 때 갔던 삼척의 유명 닭갈비 집이었다. 독 안에 든 쥐였다. 경찰을 데리고 가게에 가서 전화가 울리면 잡기만 하면 된다. 아니면 소지품 검사를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를 탄 것이 분명했다. 30분쯤 움직이더니 한 고물상에서 멈췄다. 이대로 놓칠 순 없었다. 112에 신고했다. 경찰은 처음에는 안 됐다고 했지만, 집사람이 간곡하게 부탁하니 들어줬다. 우리는 고물상에서 닭갈비 먹은 사람만 잡으면 된다고 했다. 경찰은 조사해 봤지만 그런 사람이 없다고 했다. 잠시 후 전화기가 다시 움직였다. 고속도로를 탄 것 같았다. 그리고 서울로 거침없이 달렸다. 우리는 마지막 기대를 걸고 그에게 문자를 남겼다. ‘경찰에 신고하러 갑니다.’
새벽 1시쯤 아내 전화가 울렸다.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역시나 내 번호였다. 젊은 남자는 돌려주려고 가방에 넣어 뒀는데 깜빡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택배로 내일 아침에 보내 주겠다고 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닭 같은 건망증 때문에 휴가는 망쳤고, 나는 불효를 했다. 아내는 휴대폰에 집착하는 내게 실망했다고 했다.
다음 날, 어머니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양가 부모님은 한차로 삼척의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여행 마지막 날 저녁, 아들은 마술을 부리고 춤을 추며 할머니, 할아버지를 웃게 했다. 나도 즐겁긴 했지만 어른들 보기 창피했다. 여행을 마치고 어머니와 장모님에게 사과했다. 두 분은 흔쾌히 용서해주셨다.
나는 아직도 그 불효 전화기를 쓰고 있다. 요즘도 가끔 그 생각이 난다. 부모님과 떠난 마지막 여름 휴가는 내게 창피한 기억으로 남았다. 어머니는 뇌졸중이 와서 많이 걷지 못한다. 어쩌면 함께 대금굴은 보지 못할 것 같다. 그때 좀 더 대범했으면 멋진 아들과 사위가 됐을 텐데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