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월, 인천으로 발령이 났다. 이번에도 혼자 가기로 했다. 관사는 O 대학교 후문 근처에 있다. 지어진 지 20년쯤 되는 5층 아파트다. 도배도 하고 전등도 갈아서 예전보다 깔끔했다. 같은 과에 근무하는 형님이 큰방에, 내가 작은방에 짐을 풀었다.
나는 전에 하던 일을 다시 맡았다. 형님은 달랐다. 생소한 인사, 조직, 기획 업무였다. 적응은 쉽지 않았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비중 있는 임무가 쏟아졌다. 야근해도 일은 줄지 않았다. 성격이 급한 상사로부터 꾸중도 많이 들었다. 서류와 함께 근심도 쌓여 갔다.
모처럼 일이 빨리 끝난 어느 날이었다. 그래도 아홉 시는 넘었다. 둘이 한잔하기로 했다. 맥주 네 캔과 새우깡 한 봉지를 샀다. 관사에서 간단하게 마시고 잘 요량이었다.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형님은 오랜만에 화색이 돌았다. 내게 말할 틈도 주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웃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 우리 둘은 근심을 삼키고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형님에게 메일이 왔다. 아래층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관서에 근무하는 과장이었다. 부하 직원이 대신 보낸 편지에는 밤에 조용히 해달라고 적혀있었다. 둘이 술을 마신 건 한 번뿐이다. 성인 남자 둘이 사는데, 뭐가 시끄럽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거기다가 형님은 매번 집에 늦게 들어왔다.
관사에서는 옆집의 대화는 물론 코 고는 소리까지 들린다. 새벽에는 휴대전화 진동이 느껴지기도 한다. 종종 혼자 사는 직원끼리 모여 술도 마신다. 웬만한 소음이 아니면 참고 넘긴다. 다들 외롭고 힘들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몇 달 후였다. 오랜만에 둘이 술을 마셨다. 한 번 경고를 받아서 더 조심했다. 기숙사에서 숨어 마시는 기분이었다. 성인 남자 둘이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화장실에 갈 때도 사뿐사뿐 걸었다. 상사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형님 목소리가 커졌다. 불길했다. 역시나 아래층에서 신경질적인 보복 신호가 왔다. 막대기로 천장을 두들겼다. 당장이라도 쳐들어올 것 같았다. 사감에게 걸린 것처럼 주눅 들었다. 우리는 각자 방으로 조용히 헤어졌다.
해가 바뀌고 형님은 집으로 내려갔다. 나는 안방으로 짐을 옮겼다. 아래층도 발령이 났다. 내가 쓰던 방에 비하면 이곳은 궁궐이었다. 보일러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텔레비전과 옷걸이, 책장을 놓고도 공간이 남았다. 멀리 고층 아파트 야경도 볼만했다.
며칠 후 쿵쾅거리는 소리가 났다. 위층이었다. 이사 와서 짐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그 소음은 지금도 계속된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멈춘다. 발소리로 예상해 보면 몸무게가 80kg 이상 되는 장군이 분명하다. 한 걸음 뗄 때마다 내 심장은 벌렁거린다. 누워 있으면 천장에 온 신경이 집중된다. 퇴근하면 위층에 불이 켜져 있는지부터 본다. 관사에 살면서 조용히 해달라는 것도 민망하다. 그는 그냥 걷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무척 예민한 사람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층간소음 가해자였다. 아이 둘을 키우다 보니 그렇게 됐다. 목포 집 아래층에는 노부부가 산다. 다행히 손주가 있는 분들이라 양해를 많이 해준다. 가끔 내가 봐도 심할 때만 정중히 부탁한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그분들 뵐 일은 많이 줄었다.
코로나 19가 장기화하면서 층간소음 갈등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층간소음 문제가 나오면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너무 예민해 보였다. 그러려면 단독주택에 살지 뭐하러 아파트에 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겪어 보니 이해할 것 같다. 그걸 깨닫는 데 일 년이 넘게 걸렸지만 말이다. 위층에 사는 사람도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직접 말하지 않고서는 어려울 것 같다. 그는 5층에 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