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가장 좋을 때여
“그래도 지금이 가장 좋을 때여.” 30년 전 이맘때, 옆집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한 말이다. 애들 키우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는 의미였다. 어머니는 그날도 정신이 없었다. 새벽부터 사 남매의 도시락을 싸고, 옷을 챙겼다, 초등학교 4학년인 막내의 머리도 땋아야 했다. 그렇게 애들을 보내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런다고 커피를 마시거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내기나 고추 모종 심기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그 말은 전혀 공감되지 않는 위로였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인 내게도 별 상관도 없는 얘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았다. 그리고 요즘 들어 더 자주 떠오른다.
결혼한 지 2년 조금 지나서 아들이 태어났다. 양가의 첫 손주여서 사랑을 듬뿍 받았다. 데리고 다니면 잘 생겼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까탈스럽지도 않아서 키우는 데 힘도 들지 않았다. 책 읽기를 좋아해서 한글도 일찍 뗐다. 창의력이 뛰어나 기발한 생각도 잘했다. 아들은 잠들기 전에 귓속말해 주는 걸 좋아했다. 사소한 이야기에도 잘 웃었다. 웃음소리를 들으면 하루의 피로가 싹 가셨다.
아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날, 많이 설레했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서 어색하게 큰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갔다. 장모님은 애를 혼자 보내냐며 아내를 나무랐다. 우리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어리지만 듬직했다. 참관 수업에 가면 내 어깨가 으쓱해졌다. 아들 순서는 대부분 마지막이었다. 선생님은 주원이가 가장 논리적이어서 그런다고 했다. 발표를 마치면 학부모들의 탄성이 들렸다. 공부도 잘해서 상도 많이 받았다. 졸업할 때는 국회의원상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큰 인물이 될 줄 알았다. 다른 초등학생 학부모처럼 나도 행복한 착각에 빠져 살았다.
중학교 2학년이 된 아들은 병에 걸렸다. 갈수록 더 심해졌다. 치료제도 없다는 ‘중2병’이다. 시간이 약이라고는 하지만, 가끔 화가 날 때도 있다. 아들은 시험 기간에도 스마트폰을 끼고 살았다. 첫 시험 결과는 아들을 향한 환상을 깨기에 충분했다. 학원에 다니는 영어와 수학을 빼고는 학년 평균점수와 비슷했다. 그런 성적을 받고도 전혀 자극 받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며칠 전, 아내는 화가 단단히 나서 내게 전화했다. 아들 때문이었다. 식사 중에 동생과 싸운다고 나무라자, 젓가락을 던지고 방에 들어갔다고 한다. 아내의 꾸중이 계속되자 집을 나갔다. 나는 작년에 인천으로 발령이 나서 격주로 목포에 내려간다. 사춘기인 아들과 떨어져 지내는 게 미안해 될 수 있으면 큰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한다. 몇 분간 화를 삭였다. 이유라도 들어보려고 전화했지만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몇 번 더해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너희들 돌보는 엄마 힘들게 하지 말고, 집에 들어가서 엄마에게 사과해라.’라는 문자를 남겼다. 아들은 다시 전화해도 받지 않았다. 답장도 없었다. 다음 날,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다시 문자를 남겼다. ‘너는 참 버릇없는 아이였구나. 실망했다.’라는 내용이었다. 역시나 답은 없었다.
화를 삭이는 방법은 쉬웠다. 아들을 향한 욕심과 기대를 버리면 됐다. 몇 년 전 <<엄마 반성문>>을 쓴 이유남 교장 선생님의 강연을 아내와 함께 들었다. 그분의 자녀 둘은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를 매우 잘하는 우등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4월에 첫째가 자퇴를 했다. 둘째 딸도 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했다. 그 후로 아들과 딸은 1년 반 동안 집에서 게임만 했다고 한다. 교장 선생님은 “부모 된 사람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자식을 자랑거리로 만들고자 함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학교에 잘 다니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웠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아들은 학교뿐만 아니라 학원에도 잘 다닌다. 중학교 때 공부를 하지 않았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밖에서 사고를 치거나 말썽도 부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운동도 열심히 한다. 며칠 전, 의대에 다니던 한 젊은이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면서 건강한 것만 해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잘하지 못하던 나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니 말이다. 아들은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말은 안 했지만, 행동은 많이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보낸 문자 때문인지 이 주 만에 내려온 나를 본 듯 만 듯했다. 학원을 마치고 방에 들어가서는 나오지도 않았다.
자려고 불을 끄고 누우면 안방 천장에 별이 빛난다. 아내가 아들 서너 살 때 붙여 놓은 야광 스티커다. 형광색 별을 보면 아들의 어린 시절이 떠 오른다. 귀에 대고 속삭이면, 깔깔대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다시는 돌아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서글퍼진다. 몇 년 지나면 지금의 무뚝뚝한 아들 모습도 그리워질 것 같다. “그래도 지금이 가장 좋을 때여.”라는 할머니의 말이 유난히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