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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Jul 24. 2021

모과꽃의 운명

모과꽃의 운명     


모과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가을이면 누런 모과가 탐스럽게 열리던 나무였다. 신록에 파묻힌 꽃들은 쉽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비바람으로부터 꽃을 지키려는 나무의 지혜 같았다. 진한 꽃향기를 맡으려 바짝 다가섰다. 잔가지에 덩그러니 붙어 있는 연분홍 꽃망울이 눈에 띄었다. 햇볕이 잘 들지 않아 꽃을 틔우는 데도 더딘 듯했다.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당장 떨어질 모양새였다. 마음이 몽글거렸다. 그 딸은 아직 내 가슴에 아련히 피어있었다.


16년 전, 이맘때였다. 아버지는 점을 보면서 가족의 미래를 알고 싶어 했다. 불행이 오면 사주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장남의 결혼 날짜를 받고, 궁합도 보려고 읍내에 갔다. 기대 반, 걱정 반이었을 것이다. 며느릿감은 마음에 들었고, 상견례도 잘 마쳐서다. 어쩌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첫째 딸과 사위의 궁합이 좋지 않아 혼사를 꺼렸던 일이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점집을 나서자마자 내게 전화했다.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점쟁이는 부부가 잘 맞아서 부자로 살겠으며, 자녀 운은 일남 일녀라고 했단다. 아무리 용하다지만 태어날 아이의 성별과 수까지 예언한다는 게 우스웠다. 나도 가끔 신문 모퉁이에 실린 운세를 보긴 했지만, 심심풀이에 불과했다. 운명을 믿지도 않았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랬다.     


정확히 그날을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아문 상처를 확인하는 일이다. 둘째를 임신한 지 6개월 3주째에 접어들 때였다. 아내는 몇 년 전, 첫째를 자연 분만하려고 대여섯 시간 헛심을 썼다. 의사가 안 된다고 했지만 고집을 부렸다. 다행히 둘째는 머리가 작아서 제왕 절개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려면 꾸준히 운동하라고 했다. 우리는 저녁마다 걸었다.     


그해 11월은 유난히 추웠다. 아내는 감기에 걸렸다. 며칠째 기침을 했다. 찬 바람을 맞고 나서 더 심해졌다. 태아 때문에 약도 먹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저녁 먹던 아내가 아무 말 없이 화장실에 갔다. 몇 분 지나서, 짧고 강하게 나를 불렀다. 아내는 변기에 떠 있는 연분홍 피를 보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사흘 전 진찰에서 들었던 아기가 건강하다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아내는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다. 예감이 안 좋은 듯했다. 외투만 걸치고 병원에 갔다. 며칠 전 그 의사였다. 초음파기로 아내의 배를 문질렀다. 화면에는 아이의 심장 뛰는 게 보였다. 박동 소리도 정상이었다. 눈, 코, 입, 손발 모두 형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자기를 건드리는 게 귀찮은지 움직이기도 했다. 검사는 오래 걸렸지만, 진단은 빨리 내려졌다. 자궁문이 열려 아기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 빨리 큰 병원에 가라고 했다. 기침하면서 배에 힘을 준 게 원인 같다고도 했다.      


대학 병원에 가려면 소견서가 필요했다. 의사는 무뚝뚝하게 컴퓨터 자판을 두들겼다. 아내의 증세를 적은 서너 줄의 문장은 마치 암호 같았다. 그는 자기 역할은 끝났다는 듯이 컴퓨터로 카드 게임을 했다. 화라도 내고 싶었지만, 막상 해야 할 행동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그에게 스쳐 가는 환자 중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몇 분 지나서 구급차가 왔다. 아내를 부축해 차에 눕혔다. 혼돈의 공간에 둘만 덩그러니 놓였다. 아내는 정신이 반쯤 나가 보였다. 요란한 경광등과 경보음이 혼을 더 뺐다. 아내의 두 손을 잡았다. 위로의 말은 흐트러져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어쩌면 큰일 없이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도 한 가닥 부여잡고 있었다. 환자의 처지도 공감하지 못하는 의사가 내린 처방을 부정하고 싶었다. 40여분 만에 아기 운명이 결정될 곳에 도착했다.      


나이 지긋한 의사는 아내 상태를 조곤조곤 설명했다. 3주만 버티면 인큐베이터에서 키울 수도 있다고 했다. 산모가 힘들겠지만 견뎌 보자고 했다. 아내에게는 여러 개의 주사가 꽂혔다. 이곳의 분위기는 다른 산부인과와 달랐다. 새로운 생명을 만난다는 기대보다는, 이별을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는 근심이 서려 있었다. 모두가 바라는 것은 같았다.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는 일이다. 그날 저녁, 신발장에 놓은 내 새 신발을 누군가 훔쳐 갔다. 간호사는 종종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주인 없는 슬리퍼 한 켤레를 내주었다. 화가 나지도 않았다. 사소한 것에 노여워할 기운도 없었다.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의사는 엄마가 이겨내기도 힘들겠지만, 아기가 태어나도 건강하긴 어렵다고 했다. 아직 젊으니 다른 기회가 있다고도 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내는 유도 분만 주사를 맞았다. 시간이 지나자 진통이 왔다. 떠나보내려면, 태어나게 해야 했다. 둘째를 낳는 데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배를 가르지 않고 낳은 아이였다. 아내는 그래서 더 슬펐는지 모른다. 그렇게 딸은 피지도 못하고 져 버린 꽃이 되었다.     


분만실을 나온 아내는 한숨을 쉬었다. 울지는 않았다. 두 눈 사이로 눈물이 말라 있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 보였다. 간호사는 내게 하얀 종이 상자를 건네주었다. 딸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순간 마지막 몸부림 같은 게 느껴졌다. 떨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울림은 아직까지 잔상으로 남았다. 딸은 엄마 품이 아닌 차 트렁크에 실린 채 집이 아닌 화장장으로 돌아왔다. 서류를 작성하고 아이를 작업자에게 건넸다. 작별 인사는 하지 않았다. 그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의 잘못으로 태어나자마자 떠나게 된 아기에게 진 빚을 갚을 유일한 길이었다.     

아내도 같은 마음이었다. 계획한 대로 1년이 지나자 아기가 생겼다. 점쟁이의 말처럼 또 딸이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대학 병원에 다녔다. 임신한 지 3개월이 지나자 아기가 미리 나오지 못하게 자궁 경부를 묶는 수술을 했다. 아내는 걷는 것도 조심했다. 4개월 넘어서부터는 누워서만 지냈다. 9개월 지날 무렵 아버지는 읍내에 갔다. 손녀가 태어날 날을 받고, 이름도 지었다. 우리는 그날에 맞춰 그 약속을 지켰다.     

딸은 10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에 나왔다.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한 결정이었다. 몸무게는 2.5kg도 되지 않았다. 황달까지 심하게 와서 이십 일 가까이 치료실에서 지냈다. 집에 오는 날 처음으로 딸의 눈을 봤다. 첫째를 데려올 때와는 다른 감정이 벅차올랐다. 어려운 약속을 지켰다는 만족감과 무사히 집에 간다는 안도감이 공존했다.     


집에 들어서자 네 살 먹은 아들이 가장 좋아했다. 보자기에 싸인 아기를 보자 흥을 주체하지 못해 부들부들 떨었다. 아기가 누워있는 큰방을 들락날락했다. 손을 만져 보고, 얼굴도 비볐다. 이모와 어린이집 선생님에게는 오빠가 됐다며 자랑했다. 다른 집 아이가 놀러오면 혹시 동생을 다치게는 하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사이좋은 오누이가 될 줄 알았다.     


한번은 중학생이 된 아들이 자지러지게 웃으면서 집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대답도 안 했다. 그 녀석의 미소가 사그라질 무렵, 친구 집에 놀러 간 딸이 울면서 들어왔다. 집에 오려는데, 자전거 자물쇠가 열리지 않더란다. 삼십 분 넘게 여러 번호를 눌러 봤지만 소용없었다. 문득 떠오른 게 오빠 생일이었다. 열쇠는 풀렸고, 울음은 터졌다. 딸은 오빠를 혼내 주라며 소리를 질렀다. 아내는 아들을 호되게 나무랐다. 둘은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토라져 각자 방으로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과자를 나눠 먹으며,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둘은 다투면서도 상처 주지 않고 커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나는 작년에 인천으로 발령이 났다. 격주로 목포에 간다. 그날이 다가오면 설렌다.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아이 보는 재미가 쏠쏠해서다. 사춘기가 돼 ‘중2병’에 걸린 아들은 나를 옆집 아저씨 보듯 한다. 엄마가 한 소리하면 마지못해 고개만 까닥인다. 초등학교 5학년 딸은 다르다. 엄마를 따라 터미널까지 마중 나온다. 딸은 멀리서 내가 나타나면, 자동차 뒷좌석으로 몸을 푹 숙인다. 내가 타면 큰소리로 “아빠”하며 놀라게 한다. 알면서도 속아 주지만, 딸은 그게 재밌나 보다.  

    

아이의 웃는 얼굴만 보고 싶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해야 할 일이 많아져서다. 딸은 수학 문제를 풀면서 요즘도 가끔 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한다. 아내는 아이를 엄하게 가르친다. 쉬운 문제를 틀리면 누굴 닮았냐고 나무라기도 한다. 물론 나 들으라고 한 소리다. 나는 조용히 방으로 사라진다. 더 있어봤자 일어날 일이 뻔해서다. 딸은 공부가 끝나면 주눅이 들어 방에 들어온다. 그리고는 내 옆에 눕는다. 눈을 뻐끔거리다 새근새근 잠이 든다. 방의 불을 껐다. 천장에서 별이 빛났다. 첫 아이가 서너 살 때 아내가 붙인 야광 스티커였다. 저 별처럼 이 시간도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많이 닮은 아이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딸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나는 어느 때보다 달콤한 잠에 들었다.      


다음 날, 딸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어제 일은 잊은 듯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가방을 뒤지더니 종이 한 장을 가져왔다. 보여 줄 듯 말 듯 놀리더니 건네줬다. 생활 통지표였다. 오빠 거에는 빠지지 않았던 ‘공부를 잘한다.’라는 내용은 이번에도 없었다. 그래도 딸의 통지표가 기다려진다. 선생님은 ‘순수하고 정이 많아 힘이 약한 친구나 소외된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을 지녀 다른 친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라고 적어 주었다. 딸은 사람 냄새로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     

일요일 저녁, 인천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딸은 친구들과 놀던 것을 멈추고, 나를 보려고 달려왔다. 아내에게 “어린 시절 당신을 빼닮았다.”라고 하니,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코로나 19 때문에 마스크를 쓴 딸이 안쓰러웠다. 찢어진 눈매가 더 도드라져 보여서다. 아내는 쌍꺼풀 수술하면 확 달라질 거라고 확신했다. 나는 그런 말은 하지도 말라고 했다. 예전에 조선 시대의 미인 기준이 나온 기사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복스러운 얼굴에 둥글고 큰 턱, 가느다란 눈, 가지런한 눈썹, 마치 우리 딸을 그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예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현재의 미적 기준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딸에게는 순수한 매력이 넘쳐난다. 생김새는 투박하지만 좋은 향기를 내는 잘 익은 모과처럼 말이다.     


아내에게 그 꽃봉오리를 보러 가자고 했다. 내 걱정과는 달리 활짝 꽃을 틔웠다. 며칠 지나면 열매도 맺힐 것 같았다. 가을에는 탐스러운 모과가 열리길 바라며, 차에 탔다. 늦은 봄, 모과꽃을 보며 가슴 한구석에 피어있던 기억을 떠 올렸다. 그 감정은 이제 다 아문 상처가 되었다. 어쩌면 그때 했던 약속은 그 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삶과 죽음은 하늘이 정한다고들 한다. 운명은 가끔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슬픔을 준다. 때로는 그 상처가 더 큰 기쁨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아내에게 “그때 그 애가 태어났으면, 이 애는 어떻게 됐을까?”라고 물었다. 아내는 웃으며 답했다. "걔가 얘야“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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