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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Mar 18. 2022

일장춘몽

일장춘몽 
 
몇 달 전, 가지고 있던 주식을 모두 팔았다. 스마트폰에 깔려 있던 엠티에스(MTS, 모바일 트레이딩 시스템)도 지웠다. 작년 가을부터 시장이 안 좋아지면서 손실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식이 일상을 지배하는 것도 싫었다. 퇴근하면 유튜브로 그날그날 시황을 확인하거나, 산 종목의 뉴스를 검색하는 게 중요한 일이 됐다. 틈만 나면 주가를 보려고 스마트폰으로 눈이 갔다. 호가가 빨간색이냐 파란색이냐 따라 기분도 달라졌다. 가끔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나고, 신경도 날카로워졌다.

후유증은 한 달쯤 이어졌다. 때로는 판 주식의 시세를 조회했다. 크게 오르는 걸 보며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잘한 선택이었다. 한 달을 넘기자 불면증은 사라지고, 마음의 평온도 되찾았다.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는 시간도 늘었다. 주식은 내 마음속의 악성 세포였다.
 
작년 가을까지 경제적으로 자립해서 빨리 은퇴하는 ‘파이어족’이 될 수 있겠다는 착각에 빠져 살았다. 코로나 19가 퍼지면서 폭락했던 주식이 천장을 뚫을 기세로 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산 종목들도 마찬가지였다. 재택근무와 온라인 교육이 활성화되면 컴퓨터가 많이 팔릴 것 같아 산 주식은 몇 달 만에 두 배가 뛰었다. 시골 친구가 추천해서 산 백신 회사는 엄청난 수익을 안겨줬다. 주사기와 같은 의료 폐기물이 늘어나면 수혜를 볼 것 같아 산 것도 마찬가지였다. 예상대로 계속 맞아떨어졌다.
 
동료들은 '주신(주식의 신)'이라며 부러워했다. 그때까지 초기 투자금의 열 배를 벌었기 때문이다. 돈이 복사한 것처럼 불어난다는 ‘돈 복사’라는 신조어가 실감 났다. 몇 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하루에 벌기도 했다. 계좌만 보면 모든 시름이 사라졌다. 아내에게는 비밀로 했지만, 술만 마시면 입이 근질거렸다.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내는 입이 찢어졌다. 그 이후 아내는 내 잔고를 몰래봤다. 다음 날이면 아내에게 필요한 물건이나 먹고 싶은 게 생겼다. 달콤한 꿈에서 깨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20년 초 코로나 19가 세계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전염병이 확산하면서 경기 침체를 우려한 국가들은 경제를 부양하려고 엄청난 돈을 풀었다. 금리는 거의 제로였다. 넘쳐나는 유동 자금은 증시에도 몰렸다. 2020년 3월 1500이었던 코스피 지수는 ’21년 10월 3300까지 올랐다. 무엇을 사도 오르는 시장이었다. 내 실력이 아니라 운이 좋았다.
 
세계 각국은 작년 가을부터 높아진 물가를 잡으려고 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자를 많이 주면 고위험 자산인 주식의 투자 매력은 낮아진다. 1월 초부터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이 커지면서 경제적 불확실성도 높아졌다. 주가는 속절없이 추락했다. '돈 복사'는 끝이 나고 '돈 파쇄'가 시작된 것이다.

손실이 계속되면서, 주식의 노예가 되는 기분이었다. 주가지수에 따라 그날의 기분이 달라졌다. 크게 떨어지면 심리적 공황까지 왔다. 업무에도 방해가 됐다. 미국 증시를 확인하느라 새벽에도 자꾸 깼다. 손해를 메꾸려다 보니 무리하게 주식을 사고팔았다. 투자가 아니라 도박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 싶었다. 결국 나는 주식 시장을 떠나기로 했다.

몇 달 사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계좌에는 꽤 큰 돈이 남아 있었다. '경제'까지는 아니지만 '용돈'에서는 자유로워질 만한 자금이었다. 그 돈을 빼 ㅋ뱅크에 적금을 들었다. 거기서는 실시간으로 이자가 올라가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큰돈은 벌진 못하지만, 손해를 보지도 않는다. 나쁜 종양을 떼어 내면서,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었다.

나는 요즘 유튜브로 가수 태연이 나오는 <비긴 어게인(Begin Again, 다시 시작하다.)>을 즐겨 본다. 유럽의 명소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녀의 목소리 감미롭고, 가사는 아름답다. 관객들은 즐거워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감동은 내게도 전해진다. 신나는 음악을 따라 부르기도 하고, 노래가 끝나면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한다. 주식 방송을 보면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지난 2년, 나는 주식으로 부자가 되는 꿈을 꾸며 살았다. 주식을 계속했더라면 그렇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가능성은 희박했겠지만 말이다. 오늘은 가족과 함께 여수 여행을 가기로 했다. 오동도의 동백도 보고, 광양의 매화도 보고 올 예정이다. ㅎ식당의 미나리가 듬뿍 들어간 아귀탕을 먹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긴 꿈에 깨어나보니, 봄이 성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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