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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Mar 26. 2022

고마운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 


20대 중반에 중학교 동창 열두 명과 ‘소중회’라는 계를 만들었다. 소성중학교를 다녔다고 해서 붙인 이름인데, 참 잘 지었다. 함께 웃고 슬퍼해 줄 수 있는 벗의 존재는 나이 들수록 더 소중해지기 때문이다.

 

부모님 대부분이 농사를 짓고, 자라 온 환경도 비슷해서, 친구들끼리 통하는 게 많았다. 그래서인지 큰 다툼 없이 20년 이상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우리는 경조사뿐만 아니라 명절에도 정기적으로 만났다. 가끔은 가족끼리 여행을 가기도 했다.

 

인류를 2년 이상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 19는 우리 모임에도 많은 변화를 줬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마음만 전할 때가 많아졌다. 만나지 못하다 보니 사이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반면에 더 가까워진 친구도 있다. 서울에 사는 태경이와 종혁이다.

 

내가 인천으로 발령이 난 2020년 2월부터 따로 카톡방을 만들었다. 우리는 주식 투자를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처음에는 주가 정보를 주고받거나, 좋은 회사가 있으면 서로 추천했다. 올 초 주식 시장이 안 좋아지고 나서부터는 시답잖은 농담을 하거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주로 나눴다. 그러다 보니 더 친해졌다. 나는 며칠 전, 진급했다는 걸 이 친구들에게만 알렸다. 기회가 되면 술이라도 한잔 살 요량이었다.

 

중앙부처의 사무관인 종혁이는 축하의 말을 건네며 크게 한턱 내라고 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사업하는 태경이는 달랐다. “너 고생해서 진급했으니 밥을 사주겠다.”라며 날짜를 잡았다. 몇 번이나 만나자고는 했지만 계속 말뿐이었다. 인천이 수도권이라고는 하지만 서울까지 가는 게 시간상으로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말부부를 하는 나도, 집사람이 간호사인 종혁이도 주말에는 쉽게 약속을 잡기 어려웠다. 태경이는 평일로 약속 날짜를 잡았고, 나도 이번에는 빼기 싫었다. 그의 말이 정말 고마웠기 때문이다.

 

수요일, 세 시쯤 조퇴했다. 갈 때는 버스를, 올 때는 택시를 탈 생각이었다. 술을 마시면 집에 돌아 올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며칠 전에도 술에 취해 얼마 전 옮긴 관사를 못 찾아 한 시간 넘게 길거리를 방황한 일이 있었다. 집사람은 이번에도 그런 일이 생기면 알아서 하라며 신신당부했다.

 

거리는 25km밖에 안 됐지만,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두 시간 만에 양꼬치집에 도착했다. 식당에는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전에 한 번 만난 태경이 친구 병일이도 왔다. 태경이는 양 갈비, 가지 조림, 마라탕 등 여러 가지 음식을 능숙하게 주문했다. 실력 좋은 주방장이 곧 중국으로 돌아간다며 맛있게 먹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사무관 친구가 둘이나 되니 기분 좋다며 소맥을 말았다.


양 갈비를 몇 번 먹어 봤지만 이 집 고기는 기대 이상이었다. 젊었을 때 배를 타면서 가장 좋아했던 호주산 티본 스테이크보다 훌륭했다. 부드러운 육질과 씹을 때마다 새어 나오는 육즙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태경이는 흐뭇해했다. 우리는 폭탄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술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옛 여자 친구, 우리만 아는 비밀 이야기 등이 안주로 오르니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잠시 후 식당 사장도 자리를 함께했다. 태경이 친구였다. 그는 전 지방선거에 ㄱ정당으로 구의원에 출마했다가 떨어졌다고 했다. 우리는 이제 여당 정치인이 됐다며 덕담을 건넸다. 자연스레 대선에서 누굴 찍었는지 고백하는 자리로 이어졌다. 사업도 하고 좋은 아파트에 사는 태경이가 그 후보를 찍었다니 하니 의외였다. 정치적 신념인지 지역색 때문인지 모르지만 뭔가 있어 보였다. 나도 투표를 안 하려다, 마지막에 도장을 찍기는 했지만 사실 누가돼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내가 사는 데는 다른 후보의 정책이 더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친구들이 국가의 중대사에서 나와 같은 결정을 했다고 하니 술은 더 달았다.

 

나는 여기서 인천에 가야 했다. 그러나 멈추지 못했다. 우리는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부터 내 기억은 수명이 다한 형광등처럼 깜빡였다. 택시에서 친구들이 내릴 때만 가끔 기억이 돌아왔다. 택시에서 내릴 때조차 정신이 흐릿했다. 집 비밀번호를 누르려고 보니 이상했다. 옆 동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도 실수하지 않고 자정 전에 집을 찾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잠시 그랬다.

 

집에 들어와서 스마트폰부터 찾았다. 없었다. 가방, 옷 아무리 뒤져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내일 출근 할 일이 걱정됐다. 아침에 나를 깨울 수 있는 건 전화기의 알람뿐이었다. 택시 요금을 스마트폰으로 결제한 게 어렴풋이 떠올랐다. 거기서 빠진 게 분명했다. 문제는 연락할 수가 없었다. 관사에 혼자 살기 때문이다. 공중전화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경비 아저씨가 순찰하고 있었다. 고맙게도 흔쾌히 전화를 빌려주었다.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술주정뱅이의 부탁을 계속 들어줬다. 마치 우리 아버지처럼 말이다.


먼저 아내에게 전화했다. 욕을 먹을 게 뻔했지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다행히 아내가 먼저 택시 기사와 통화가 된 듯했다. 연락이 안 되자 다섯 번 넘게 전화를 걸었단다. 기사는 그때서야 진동을 느껴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다행히 인천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기사는 수고비는 조금 생각해 주셔야 한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얼마를 드려야 하느냐고 물으니, 생각해서 많이는 말고 조금만 주라며 계좌번호를 불러줬다고 한다.


나는 전화를 찾은 것만으로도 안도가 됐다. 20분쯤 지나자 아파트에 택시가 들어섰다. 분명 내가 탄 차였지만 기사 얼굴을 그제야 제대로 봤다. 무려 한 시간 가까이 타고 온 차인데도 말이다. 너무 기뻤고, 술도 덜 깨서 수고비는 5만 원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내 의지였는지, 기사의 요구였는지는 아직까지 기억나지 않는다. 현금이 없어 계좌 이체를 하려고 보니 은행 정기 점검 시간이었다. 기사는 한심하고 못 믿어운 듯 쳐다봤다. 내일 주라며, 친절하게 계좌번호와 이름을 문자로 보냈다. 아내는 또 사고를 쳤다며, 쓴소리를 해댔다.


밤새 일어난 일 때문인지,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속이 쓰릴 뿐만 아니라, 아내에게 들을 구박도 걱정이 됐다. 4만 원에 가까운 택시비가 찍힌 메시지는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심신미약 상태에서 공정과 상식에 어긋나게 주기로 한 사례비도 떠 올랐다. 택시비와 이동한 거리를 보면 2만 원쯤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어제 즐거웠던 비용이라고 아린 속을 달래며 화끈하게 입금 버튼을 눌렀다. 나는 그날 택시 기사에게 가장 고마운 손님이 됐을 것이다.


친구들 카톡방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친구들은 택시 앞자리에서 스마트폰으로 결제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찾아서 다행이라며 위로해줬다. 술 먹고 정신을 놓은 건 내 탓이니 기사를 원망할 일도 아니었다. 스마트폰을 못 받았으면 출근 걱정에 꼬박 날을 샐뻔했다.


아내는 그날 이후로 사랑의 잔소리를 하고 있다. 듣고 있자면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 없다. 몇 달 전에는 지갑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아내에게 꼼짝없이 당해야 할 듯하다. 칠칠치 못한 남편과 사느라 속이 문드러지는 집사람도 참 고마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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