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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May 04. 2022

아들

아들

2년 넘게 인천과 목포를 오가며 주말부부로 살고 있다. 그날도 금요일 늦게 집에 도착했다. 아내는 저녁을 차려 놓고 있었다. 집밥이 주는 건강한 기운으로 허기가 가실 무렵, 아내가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중학교 3학년 아들의 가정 통신문이었다. ‘생활 습관’, ‘친구 관계’ 같은 것들은 자기가 썼으니, ‘담임 선생님께 바라는 점’은 알아서 적으라고 했다. 몇 년째 글쓰기를 배우고 있으니 믿어 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대충 뭉개려고 했지만, 집사람은 내 맘을 읽은 듯했다. 일요일 아침부터는 목소리가 세졌다. 안 써 주면 빈칸으로 보낼 테니 두고 보라고 했다. 결국 펜을 들었다. 에이포(A4) 종이 5분의 1밖에 안 되는 네모 상자였지만, 막상 채우려고 보니 첫 문장부터 막혔다.

아들을 잘 알지 못하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주말에만 잠시 만나니 그럴 만도 했다. 아내에게 전해 듣고, 내가 본 아들은 우등생과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심하게 앓던 ‘중 2병(중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 나타나는 사춘기 증상)’이 낫긴 했지만, 공부에는 여전히 관심이 없어 보였다. 침대에 누워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휴대폰을 보는 게 일과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끼고 살던 책과는 의절한 듯했다. 기대만큼이나, 아쉬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많은 초등학생 학부모가 ‘내 아이는 영재가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진다고 한다. 우리 부부도 그랬다.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이국종 교수의 <골든아워>를 몇 번 읽더니,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는 학교 대표로 국회의원상까지 받았다. 말도 유창하게 하고, 글도 논리적으로 잘 썼다. 곧 꿈을 이룰 것만 같았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도 기다려 주면 나아질 거로 생각했다. 공부 욕심이 많았고, 경쟁심도 강했기 때문이다. 그 환상은 중학교 2학년 시험에서 완전히 깨졌다. 아들은 도덕을 60점 받았다. 학원에 다니는 영어, 수학을 빼곤 암기 과목인 한문과 역사도 비슷했다. 더 큰 문제는 성적이 안 좋아도 속상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아들을 떠올리며, 선생님에게 몇 가지 부탁을 써 나갔다. ‘공부해야 하는 동기와 자극을 줬으면 좋겠다.’라는 내용이었다. 아내는 읽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지나서 아내는 선생님과 상담한 내용을 전했다. 1학년 때도 담임이었던 선생님은 아들의 성적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반에서 지능지수가 가장 높았고, 야물기도 해서 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등수가 중간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아들에게 충격을 줘야겠다고 했다. 아들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들은 건 처음이었다. 쓴웃음만 짓고 넘길 일은 아니었다. 살짝 화가 나기도 했다. 잠시 마음을 추슬렀다. 아들의 잠재력을 한번 더 믿고 싶었다. 아들에게 다음 내용으로 카톡을 보냈다.       

             


사랑하는 주원아! 힘든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지? 앞으로 4년, 네 노력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진단다. 너는 머리가 좋고, 영어, 수학 기초가 탄탄해서 조금만 노력하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서 꿈도 이룰 수 있을 거야. 아빠는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시작한 걸 가끔 후회한단다. 늦게나마 열심히 해서 공무원이 된 걸 다행으로도 생각한다. 지금 힘들겠지만, 4년 더 고생하면 남은 인생이 달라지니 열심히 해 보자. 파이팅!



속이 후련했다. 가슴에 있던 큰 앙금을 비워낸 듯했다. 어쩌면 아들보다는 나를 위한 문자였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에게 답장이 왔다. 살짝 기대하면서 카톡을 열었다. ‘네’라는 한마디였다. 원래 답장을 길게 보내지 않는 것은 알았지만, 내심 아쉬웠다. 두 시간쯤 지나서 아내가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 아들이 선생님에게 보낸 문자를 선생님이 갈무리해서 아내에게 보내 준 것이었다. 아들은 선생님에게 이제부터 열심히 공부할 거라고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아들의 행동이 내가 보낸 글 때문이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다짐했다고 하니 내 마음이 조금은 전해진 듯했다.

아들은 며칠 후 엄마에게 전화해 “큰일 났다.”라고 했다. 선생님에게 자기 등수를 들었단다. 그러면서 머리가 좋기 때문에 5, 60등은 금방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열심히 해 보라고 했단다. 아들은 내게도 자기 등수를 능청스럽게 말한다. 요즘은 시험 기간이라고 공부도 한다. 학원에서는 수업 태도가 많이 좋아졌다고 칭찬도 듣는다. 수학 학원 원장님은 수학 머리가 뛰어나 앞으로 좋은 점수를 받을 것이라고도 했다. 학교에서도 학습 분위기를 조성하고, 발표를 잘해서 받은 상점 문자가 전보다 자주 온다.     

아침 운동을 하면서 아들이 5학년 때 케이비에스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녹음 파일을 들었다.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독서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을 인터뷰했는데 아들이 나선 것이다. 아들은 꿈이 뭐냐는 리포터의 질문에 의사라고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읽은 <아저씨, 진짜 변호사 맞아요?>에서 일등이 된다고 꿈을 이루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니라는 걸 느꼈다고 야무지게 말했다.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때 꾼 꿈을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들의 말처럼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나처럼 공부를 못했어도 풍요로운 삶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 며칠 전, 아들은 내 생일 선물로 10만원을 보냈다. 자신이 모아 둔 용돈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착하고, 배려심 많은 아들은 행복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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