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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Apr 14. 2022

학교 차별

학교 차별


‘용의 꼬리보다 닭의 머리가 낫다.’라는 속담이 있다. 훌륭한 사람의 그늘에 있기보다는 보잘것없어도 우두머리를 하는 게 좋다는 의미다. 선배들은 가끔 비슷한 말을 인용하며, 1학년을 격려했다. 거기에는 앞으로 받게 될지도 모를 차별을 암시하는 복선도 깔려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해양대학에 가려고 마음먹었다. 배를 타면 외국 구경도 하고, 군대도 안 가며, 돈도 모을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순 없을 것 같았다. 대학 입학 자료를 찾아보니, 두 군데가 있었다. 부산에 있는 ㅎ대학교는 애초에 접었다. 사실, 모의고사 성적으로는 목포에 있는 ㅁ대학교도 낙관할 순 없었다. 다행히 수능을 잘 봤다. 1995년 2월, 목포행 무궁화호 열차를 탔다.


해기사(배의 간부인 항해사와 기관사)를 양성하는 특수 목적 대학이라서 전국 각지에서 신입생이 들어왔다. 학비도 싸고 기숙사와 식사까지 공짜로 주니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취업률도 전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었다. 그 때문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고도 여기에 들어온 친구도 있었다. 몇몇은 ‘닭의 머리’가 되려는 꿈을 품었는지도 모르겠다.


선배들은 종종 두 학교가 경쟁, 가끔은 앙숙 관계라고 이야기했다. 1993년 전까지는 전문대였는데, 4년대로 승격되면서 더 심해졌다. 그건 우리만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저쪽은 우리를 한 수 아래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해운계의 요직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넓은 바다로 나가면서부터 그 오묘한 관계를 실감할 수 있었다.


대학 3학년 때, 우리나라와 중동을 오가는 유조선에서 실습했다. 선원에게 인기가 좋은 대기업이었다. 그 회사는 오래전부터 ㅎ대학 출신을 주로 뽑았다. 그 배에도 간부 선원 여덟 명 중 우리 동문은 둘뿐이었다. 출신 학교를 묻는 건 처음 봤을 때뿐이었다. 동문이 아니더라도 나를 후배나 동생처럼 대해줬다. 실력도 뛰어났고 인성도 좋았다. 역시 명문 학교는 다르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본사에서 근무하다 잠시 파견 나온 2등 기관사는 기계 다루는 실력이 좋다고 소문난 인재였다. 하지만 부원들 사이에서는 평이 좋지 않았다. 연장자에게도 반말 비슷하게 해서 버릇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날 당직을 같이 서게 됐다. 처음에는 잡담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학교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교묘하게 우리 학교를 비하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문대라는 누구나 아는 사실을 강조했다. 우리 선배가 선장일 때 좁은 해협을 통과하지 못해 애먹었던 옛이야기를 늘어놨다.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얕잡아 본다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졸업하고 3년 넘게 배를 탔다. 그리고 해양 관련 공무원이 됐다. ㅎ대학 출신들을 많이 만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은 동료로서 편하게 지낸다. 때로는 동문보다 더 친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가끔 학벌주의에 빠진 편협한 인간도 있지만 말이다.


한 번은 그런 일 때문에 분노한 적이 있다. 10년도 넘은 일이긴 하다. 공무원이 되고 나서 정보를 얻을 게 있어 해기사가 많이 찾는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갔다. 구인 광고 게시판이 눈에 들어왔다. 구비해야 할 자격증, 어학 점수와 함께 ㅎ대학 출신이어야 한다는 자격 요건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실력이 아니라 ㅎ대학 졸업장만 보고 뽑겠다는 건 다른 대학 출신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화가 났다.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게시판에 글을 적었다. ‘ㅎ대학 출신만 뽑을 거면 동창회 사이트에 올리면 되지,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그런 공고를 올리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라는 내용이었다. 댓글에는 우리 동문의 분노가 달렸다. 그 공고문은 끝내 내려지지 않았다. 그 이후로 그런 속 좁은 글은 보지 못한 것 같다.


아직 해운계의 중요 요직엔 ㅎ대학 출신 비율이 높다. 대학 간판으로 실력을 평가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조금은 남아있다. 하지만 우리 모교도 해양 수산계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실력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두 학교는 편을 가르고 싸우는 게 아니라,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서로 돕고 함께 커나가야 하는 관계다. 그래야 해운계가 더 발전할 수 있다.


2019년 구직자의 외모, 출신 지역, 학력 등을 이력서에 적는 것을 금지하는 ‘채용 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개정안’ 시행됐다. 채용 과정에서 편견이 개입될 요소를 제외하고, 공정하게 실력을 평가하여 인재를 선발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용’과 ‘닭’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정해지는 게 아니다. 졸업하면서 또는 사회에 나와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간 아들과 진로 이야기를 나눴다. 아들은 공부를 중간쯤 한다. 나는 아들의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고 믿고 있다. 놀더라도 영어와 수학은 꾸준히 하라고 조언했다. 공부할 필요성을 느꼈을 때 기초가 부족해서 느꼈던 절망감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아들이 목표를 정하지 못하면 해양대학교를 추천할 생각이다. 이곳에서는 영어를 잘하면 ‘용의 머리’가 될 기회가 많아진다. 아들의 성적이 잘 나오면 ㅎ대학을 보내고 싶은 게 부모 마음 같다. 조금 부족하면 ㅁ대학도 좋다. 학교보다는 실력 좋은 사람이 '용'이 될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대학 간판 때문에 차별받던 시대도 조금씩 저물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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