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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Jun 14. 2022

이제 중심에 서다

‘이제 중심에 서다. 대한민국 사무관’이란 문구가 인쇄된 배경이 컴퓨터 화면을 가득 채웠다. 왠지 가슴이 웅장해지는 문구다. 이제 사무관이 된다는 자부심도 들었다. 한 가지 의문도 생겼다. 여기서 말하는 ‘중심’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 역할이 중요하다는 의미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교육 과정의 절반을 마친 시점이지만, 아직 그 정확한 답을 얻진 못했다.


약 18년 전, 9급 공무원이 됐다. 그리고 올해 3월, 사무관 승진 후보자가 됐다. 다른 직급과는 다르게 사무관은 ‘승진 관리자 과정’을 이수해야 임용된다. 사무관이 되고 싶었던 여러 이유 중에는 이 교육도 포함된다. 6주 가까이 업무에서 벗어날 수 있을뿐더러 선배로부터 알차고 재밌다는 경험담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받았던 9급 신규자 교육의 좋은 추억도 빼놓을 수 없다. 배 타던 일을 그만두고, 1년쯤 방황하다 공무원이 됐다. 평생직장을 얻었다는 것 외에 공직의 가치와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유능한 교수들의 강의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존재가 돼 가는 것 같았다. 한 달 넘게 다른 부처 공무원과 한 분임이 돼 과제를 해결하고, 정책 현장에 다녀온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젠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흐릿해졌지만, 평생 잊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추억 중의 하나다.


제165기 교육은 5월 16일부터 시작됐다. 이 과정도 2년 가까이는 온라인으로만 진행됐다. 다행히 이번 기수부터는 코로나19가 완화되면서 집합 교육도 병행한다. 처음과 마지막 2주는 재택, 중간 2주는 국가인재개발원에서 진행하는 방식이다. 첫날 입교식도 영상으로 했다. 국민의례도 빠지지 않았다. 일어서려는데, 편하게 입었던 반바지가 신경 쓰였다. 물론 영상에 하의까지 비치지는 않았지만, 처신이 바르지 않는 것 같아서 쓴웃음이 났다. 그 때문에 어느 때보다 진중한 마음으로 묵념까지 마쳤다. 오후에는 분임원 간의 첫 만남이 있었다. 9급 교육 때와 마찬가지로 나이로 보면 나는 중간쯤 됐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말을 많이 하면 분임 정책 연구를 총괄하는 연구장을 맡을 수 있다는 선배들의 조언이 떠올랐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다행히 가점이 필요한 교육생이 나섰다. 부처에 따라서는 성적에 따라 임용 일자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분임조도 작은 조직처럼 움직였다. 적극적으로 이끌어 가는 리더층 서너 명, 기본만 하는 중간층 네다섯 명, 될대로 되라는 방관층이 나머지였다. 나는 맡은 역할은 하지만 나서지는 않는 중간 그룹에 끼였다.


재택 교육은 주말부부를 하는 내겐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5시 반쯤부터 하루를 시작되는 나 때문에 깊게 잘 수 없다는 불평이 터져 나오긴 했지만, 아빠가 곁에 있어서 좋은 듯했다. 9시 20분부터 수업이 시작돼서 여유로웠다. 뒷산을 한 바퀴 돌고, 가족과 아침을 같이 먹고, 아들을 중학교까지 태워 줘도 시간이 남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듣는 1교시 수업은 언제나 상쾌했다. 2년간 온라인으로 교육해서인지, 교수들의 강의는 능수능란했다. 교육생에게 질문하면, 채팅 창에 답변이 연달아 올라왔다. 그 의견을 대부분 읽어 주면서 호응도를 높였다. 우리나라 최고의 공무원 교육 기관답게 강의 내용도 훌륭했다. ‘공직 리더십의 이해’라는 과목에서는 공무원의 역할을 구분해서 설명해 줬다. “주무관 시절에는 주어진 업무만 잘해도 인정받지만, 사무관이 되면 팀원을 챙기고 팀원과 함께 성과를 책임져야 한다”라는 말에 공감이 갔다. 이 또한 사무관을 공무원 조직의 중심이라고 부르는 이유일 것이다. 2주간의 교육은 ‘세상의 가장 빠른 새가 무엇이냐?’라는 아재 개그의 답처럼 ‘눈 깜작할 새’ 지나갔다.


고대하던 집합 교육이 시작됐다. 영상에서만 보던 분임원을 만나는 것도 기대됐다. 중강당의 내 자리는 뒤에서 세 번째 줄이었다. 앞 사람들의 머리는 희끗희끗했다, 머리숱이 듬성듬성 있는 사람도 많았다. 문득 신임 교육 때 분임원들이 떠올랐다. 이제 이름도 잘 기억나진 않지만 잘 지내는지 궁금했다. 살짝 뭉클해지기도 했다. 요즘 아이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면 웃음이 나다가도 눈물이 핑 돌 때가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일까! 뚜렷이 설명할 수 없지만 지나가 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집합 교육 기간에는 리더십 실습이 많았다. 5급 승진자 역량 평가를 받을 때 경험해 본 ‘현안 대응 실습’과 ‘팀워크 활성화 실습’이었다. 팀워크 실습에서는 사무관으로 부임해서 조직원 간의 갈등이 있는 주무관과 면담해서 문제를 해결하라는 과제를 줬다. 문득 내가 롤 모델로 삼고 있는 김 서기관님이 떠올랐다. 신안 임자가 고향이던 그분은 유난히 갑오징어 회와 술을 좋아했다. 사실 내가 이 교육을 받는 위치에 오르기까지도 그분의 역할이 컸다. 목포에서 과장으로 모셨던 인연으로 본청 국 서무로 발령을 받게 됐다. 그분은 사무관으로 내 직속 계장이었다. 서에서만 일하던 내게 본청은 딴 세상이었다. 매일 쏟아지는 일을 능숙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덤벙대기도 해서 과장님께 싫은 소리를 많이 들었다. 하루는 나만 있는 사무실에 과장님이 들어왔다. 과장님은 “너는 실력도 없는데 어떻게 본청에 왔냐?”라며 비아냥거렸다. 옆 과의 후배와 비교하기도 했다. 직원들 앞에서는 목포로 다시 내려보내 버린다며 모욕을 주기도 했다. 발령 내 주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다. 그때 내 중심을 잡아준 게 김 서기관님이었다. 조그마한 성과라도 있으면 과장님과 직원들에게 나를 칭찬해 줬다. 과장님에게 혼나고 나오면 함께 소주를 마시며 툴툴 털 게 만들기도 했다. 과장님도 1년이 지나자 나를 조금씩 인정해 주기는 했지만, 그때 그 상사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쉽게도 김 서기관님은 퇴직을 2년 앞둔 몇 년 전 세상을 떠나셨다. 김 서기관님을 떠올리니 ‘이제 중심에 서다.’라는 의미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배가 안전하게 항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중심을 잘 잡는 것이다. 배가 한쪽으로 쏠리면 작은 파도에도 침몰할 수 있다. 화물뿐만 아니라 사람의 목숨도 잃을 수 있다. 사무관은 조직의 가운데가 아니라 중심이다. 공무원 조직에서 정책을 수립하고 기획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팀장으로서 과장과 팀원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아 줘야 한다. 그래야 조직의 목표를 원활히 달성할 수 있다.


이번 주까지 교육의 절반이 끝났다. 다음 주 화요일부터는 새로운 3주 교육이 시작된다. 하루하루 지나는 시간이 아깝다. 교육이 끝났을 때 내가 조직의 중심을 잡을 만큼 성장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아마 짧은 시간에 그렇게 되기는 힘들 것이다. 다만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긴 하다. 내가 중심에 섰을 때 조직원 모두가 불안하지 않도록 역량을 키워야겠다. ‘이제 중심에 서다. 대한민국 사무관’이라는 표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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