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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Sep 08. 2022

삘기 꽃의 추억

삘기 꽃이 필 때면 봄은 얼어 있던 추억마저 싹 틔운다. 청아한 소쩍새의 울음소리는 동산에 둘러싸였던 시골집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살이 오른 머윗대는 어머니의 걸쭉하고 담백했던 들깨탕을 그립게 한다. 가녀리게 자라나는 이 풀은 평생 흙을 일구고 사는 아버지를 향한 내 기억을 돋아나게 한다.  봄기운이 대지에 퍼지면, 아이들은 논두렁을 두리번거렸다. 땅을 비집고 올라온 삘기 때문이다.


삘기는 전라도 말로는 삐비라고도 불리는 식물이다. 그 여린 순을 엄지와 검지로 쥐어 당기면 쑥 뽑혔다. 연두색 잎에 싸여 있는 꽃이삭은 쌀처럼 희고, 솜처럼 부드러웠다. 껌처럼 오물거리면 달짝지근했다. 어른들의 말싸움에도 자주 쓰였다. 자신을 하찮게 여긴다 싶으면 “내가 논두렁의 삐비 껍딱(껍데기의 전라도 방언)으로 보이냐?”며 성을 냈다. 흔하디흔했지만, 친구들은 경쟁하며 삘기를 모았다. 몇 개만 먹고 고랑창으로 버리면서도 말이다. 삘기는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삘기 꽃이 필 때면, 잘 갈린 논에 물이 채워졌다. 낮에는 벌레를 잡아먹으려고 백로가 모여들었다. 밤이 되면 개구리가 요란하면서도 애처롭게 울면서 짝을 찾았다. 농부들의 마음은 바빠졌다. 농사 중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큰일인 모를 심어야 해서다. 삘기 뽑는 게 시시해질 나이가 되면, 부모님을 따라 논밭에 가야 했다. 동네 형, 누나들도 그래서 당연한 듯 여겼다. 농기계가 많아져 일이 줄긴 했지만, 이때쯤에는 아이의 손도 아쉬웠다. 어느 날, 내가 힘이 생긴 듯 보였는지 아버지는 모내기하는 걸 도우라고 했다. 이앙기가 심을 모판을 논둑으로 옮기는 일이다. 서너 판을 들기엔 아직 버거웠다. 무게를 줄이려 배에 걸치고 나르다 보면 옷은 흙 범벅이 됐다. 거머리에 물려 피가 나기도 했다.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고 입은 굳게 다물어졌다. “내가 농사를 지으려고 태어났냐?”라며 불평도 했다. 다른 친구들에게 비하면 적게 하는 편인데도 그랬다. 어머니는 우리가 논밭에 나오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굳이 애들까지 흙을 묻히게 하냐며 아버지와 다투기도 했다. 커서 농사를 지을 수도 있으니 해 봐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나는 일을 시키려는 핑계인지, 밥값이라도 하게 하려는 아버지의 진심인지 헷갈렸다.


아버지는 장남인 내게 거는 기대가 컸다. 없는 살림에도 주산이며, 컴퓨터 학원 같은 데 보냈다. 문제집도 부탁하는 대로 사 줬다.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한 자신처럼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꾸 논일을 가르치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일하면 할수록 마음은 딴 데 가 있었다. 오락실이나 놀이터에서 놀고 있을 서울 사촌 동생들만 떠올랐다. 굶어 죽는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삽은 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드는 데는 아버지도 한몫 거들었다.


 아버지는 부지런했지만, 살림살이는 쉽게 늘지 않았다. 우리 집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방 두 칸짜리 흙집이었다. 벽은 금이 가서 구멍이 난 데도 있었다. 쥐들은 천장에서 요란히 몰려다녔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 가자고 하면 다른 이유를 대며 피해 버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장에 가면서도 후줄근한 옷을 입고, 흙이 묻은 신발을 신었다. 점쟁이가 아니더라도 무슨 일을 하는지 금방 맞힐 수 있었을 것이다. 가끔은 나를 농부의 아들로 만든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지역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다. 자연스레 논밭에 나갈 일은 줄었다. 농번기다 싶으면 일부러 기숙사에서 나가지 않기도 했다. 기숙사가 문을 닫는 여름방학은 어쩔 수 없었다. 내 일과는 골방에 처박혀 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양심조차 없는 건 아니었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부모님을 따라나서기도 했다. 비라도 내린다는 예보가 있으면 아버지는 더 조급해졌기 때문이다. 동네 어른들은 별일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한마디씩 하곤 했다. 아버지는 벼가 병에 들지 않도록 농약을 치고, 성장을 방해하는 피도 뽑았다. 밭에서는 고추와 복분자도 땄다. 농부에게 최고의 칭찬은 “농사를 참 잘 지었다.”가 아닐까! 아버지는 그런 얘기를 자주 들었다. 같은 모종을 심어도 수확량이 많을뿐더러 품질까지 좋았다. 비결을 묻는 이웃의 질문에 아버지는 허허대며 웃어넘겼다.


한번은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는 또래들이 농촌 봉사 활동을 왔다. 학생들은 집마다 몇 명씩 나눠 일손을 도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술을 진탕 마시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방에 누워 있었다. 겨우 눈을 떠 문을 열었는데, 우리 집 일을 돕고 온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옷에는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얼굴은 더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아버 지는 그때 내가 농사짓기 힘든 싹이라는 걸 눈치챘는지 모르겠다. 그 이후로는 굳이 농사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을 오가는 화물선을 탔다. 바다에는‘엘도라도’와 같은 꿈과 미래가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배 타는 것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기관실의 일은 고향의 여름 농사만큼이나 혹독했다. 거대한 엔진이 뿜어대는 배기열 때문에 온도는 40도에 달했다. 기계들이 내는 굉음은 고막을 찢는 듯했다. 한 시간쯤 일하다 보면 작업복은 기름과 땀으로 축축해졌다. 내가 선택한 일이어서 투정을 부리거나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외로움이었다. 한 달 넘게 수평선만 보일 때도 있었다. 보고 싶은 사람과 전화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무료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나를 달래주는 건 싸디싼 위스키와 밤하늘의 은하수뿐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내려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태평양과 적도를 수없이 항해하며, 달력에 천여 개의 가위표를 그리고 나서야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사표를 쓰긴 했지만, 마땅한 대안도 없었다. 직장이 널려 있는 것도 아니었다.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다 보니 몸은 망가졌다. 친척이나 친구를 만나는 것도 꺼려졌다. 아버지는 자식 농사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웠던 것 같다. 아들이 스물여덟 살이 넘도록 직업조차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어느 날 시골집으로 나를 불렀다. 농사짓는 것을 도우라는 게 아니었다. 몇 년이고 괜찮으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했다. 거기에 들어가는 돈은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다. 아버지도 이번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아버지는 서른 살 가까이 됐을 때 논 한 마지기로 시작했다. 내가 서너 살 때는 중동에서 일했다. 돈이 모이면 조금씩 논을 사들였다. 농부의 힘은 땅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논과 밭을 일궈 얻은 수확을 사치 없이 모았다. 그사이 땅은 조금씩 늘었고, 집도 새로 지었다. 아이 넷을 출가시키고, 일곱 명의 손주를 얻었다. 아버지는 큰아들의 직업을 말할 때면 목에 힘이 들어간다. 말단 공무원인데도 그랬다. 누군가 “자식 농사를 잘 지었다.”라고 하면 목소리는 더 커진다.


아버지의 머리는 삘기 꽃처럼 하얗게 피었다. 허리는 삘기 줄기처럼 가늘어졌다. 몇 년 전부터는 농사도 대부분 줄였다. 그래도 집 앞에 있는 논 한 마지기는 직접 짓는다. 자손들에게 줄 식량 때문이다. 아버지는 모든 농사를 혼자 한다. 나는 일이 바쁘고, 멀리서 산다는 핑계로 추수를 도운 적이 없다. 아버지는 그래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는다. 묵묵히 씨를 심고 잘 자라도록 정성과 노력을 기울일 뿐이다. 늦가을이 되면 삘기 꽃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그사이 곳간은 쌀로 가득 찬다. 아버지는 자녀들이 올 때마다 한 가마니씩을 내어 준다. 아까워하거나 아끼려고 하지 않는다. 택배를 보낼 수도 있지만, 귀찮으니 와서 가져가라고 한다. 어쩌면 그 이유보다는 손주를 보고 싶은 마음이 클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그리워한다.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전화기로 문자 한 통 보내는 것도 인색하다. 가끔은 너무 냉정하게 대해서 무안할 때도 있다.


얼마 전, 시골집에 들렀다. 아버지는 일흔여섯 번째 봄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에도 곳간 문을 열며 쌀 한 가마를 실으라고 한다. 46년 가까이 농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쌀값도 모르고 살았다. 아버지는 우리를 보내며 언제나 또 올 거냐고 물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꺼내지 않은 말이었다. 목소리에 힘은 약해졌지만, 여운은 더 크고 깊었다. 아내도 나와 똑같은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표정에 담긴 쓸쓸함과 말투에 섞인 애틋함이 우리 가슴에 들어와 소용돌이쳤기 때문이다. 나는 곧 또 올 거라고 답했지만, 쌀이 떨어지는 그때가 아닐까 싶다.


초등학생 딸과 공원을 산책했다. 이팝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소복한 꽃송이가 사발에 얹힌 흰 쌀밥 같기도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오랜만에 삘기도 보였다. 그 흔했던 게, 도시에서는 관심을 두어야 겨우 찾을 수 있다. 뽑으면서 느끼는 촉감은 그대로다. 딸에게 건네주며 맛있는 거라고 하니 믿지 않는 눈치다. 어떻게 먹는 건지 보여 준다며 하얀 꽃이삭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아이에게 권한 손이 민망했다. 예전 그 달짝지근함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삘기가 아니라 내 입맛 탓일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삘기 꽃이 필 때면 내 마음을 채우는 아버지와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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