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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Sep 27. 2022

마당 개

마당 개


법의 적용과 도덕적 판단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때로는 그 변화에 순응하지 못해 범죄자나 비윤리적 인간이 된다. 개고기 식용 문제는 우리 사회의 오래된 논란거리 중 하나다. 개를 죽이거나, 개고기를 파는 건 불법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개고기를 먹는다. 그들은 개도 돼지, 닭, 소와 같은 동물뿐이라고 주장한다. 반려견을 네 마리나 키우는 대통령조차 “보신탕 문화를 다른 사람의 선택과 관련한 문제”라고 답한 걸 보면, 그 문제를 법으로 쉽게 재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특히나 반백 년 가까이 가축으로 개를 기르던 시골 노인에게는 말이다.


얼마 전, ‘자신이 키우던 개를 보신탕집에 팔아넘긴 주인‘ 뉴스가 여러 사람의 공분을 샀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60대 노인이 키우던 개가 동네 주민의 해코지로 심한 상처를 입었다. 노인은 개를 병원에 데려갔지만, 돈 때문에 치료를 포기했다. 그리고는 개를 보신탕집에 넘겼다. 개가 도살된 사실을 동물 보호단체가 밝혔다. 사람들이 더 분노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주인을 보고 개가 크게 짖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운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래서 복순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나 또한 주인의 행동이 윤리적으로 잘못됐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견주를 마냥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그 일이 벌어진 지역에 살고 있는 부모님도 비슷한 선택을 했을 거라는 심증 때문이다. 개 주인은 몇백만 원이 훌쩍 넘는 치료비에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시골 노인에게 적은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보신탕집보다는 다른 선택을 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선택지가 많지는 않지만 말이다. 현재의 기준과 가치로 개 주인을 비난하는 것도 비윤리적이긴 매한가지다.      


내가 어렸을 적, 그러니까 약 40년 전부터 시골집에선 개를 키웠다. 그 시절 농촌의 누렁이는 농부들의 보양식이자, 개장수에게 팔아서 살림에 보태는 요긴한 동물이었다. 요즘은 시골에도 먹을 것이 풍족해서 굳이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시골 마당을 차지한 건 도시에서나 보던 작은 개들이다.  그렇다고 개들이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기사에 사진이 실린 복순이는 삽살개 잡종이었다. 눈길을 끄는 게 있었다. 복순이의 목줄이었다. 많은 마당 개가 그렇듯 복순이에게 움질일 수 있도록 허용된 공간은 1m 남짓이다. 시골 개들은 주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공포에서 벗어난 대신 자유를 빼앗기고 살아간다. 그렇다고 시골 노인에게 현재의 윤리적 기준에 따라 개를 키우는 걸 바라는 것도 쉽지 않다. 시골 노인에게 개는 인생을 함께한다는 반려견이기보다는 적적함을 달래 주는 애완견이자 식용견이라고 인식하며 살아온 세월이 훨씬 길기 때문이다.


이제 시골에서는 개를 많이 기르지 않는다. 개가 새끼라도 낳으면 애물단지가 된다. 대부분이 노인인 시골에서 강아지를 거저 준다고 해도 가져간다는 사람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귀찮은 짐처럼 떠맡겨진 강아지는 목줄에 묶여서, 출산하는 악순환을 반복된다. 버려진 개가 들개가 되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다행히 지자체에서 마당 개가 무분별하게 늘어나지 않도록 중성화 수술비를 지원한다고 한다. 시골에서도 올바른 반려동물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 개발도 추진한다고 한다. 복순이 주인에게 현재의 도덕적 가치로 지나친 비난을 퍼붓기보다는 마당 개들과 시골 노인이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고민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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