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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Oct 01. 2022

빠른 77년생

빠른 77년생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집에서 4km쯤 떨어진 면 소재지에 있었다. 선생님뿐만 아니라 친구의 이름도 가물거릴 만큼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학년이 시작되는 3월에 하는 생활 환경 조사다.


선생님의 질문에 따라 아이들은 대부분 같이 손 들고, 내렸다. 부모님이 대부분 농사를 짓다 보니, 사는 환경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가끔 "와" 같은 탄성이 터지기도 했다. “집에 차 있는 사람”이라고 물었던 것 같다. 물론 힘있게 손을 드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내 고개를 푹 숙이게 만들기도 했다. 뭉그적거리며 손을 들면 친구들이 웅성거리는 것 같았다.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라고 놀리는 몇몇 친구의 비아냥은 아직도 잔상처럼 남아 있다.


지금 드는 생각이지만, 선생님이 학생의 나이를 그런 방식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는지 궁금하다. 부모님에게 물어봐도 되고, 생활기록부 같은 거에도 기록이 다 되어 있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선생님 편의주의적인 질문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종종 받았던 것 같다. 그렇다. 나는 일곱 살에 학교에 들어간 77년생이다. 그것도 출생 신고가 늦었다고, 음력은 76년생이라고 핑계 댈 수 없는 4월생이다.


아버지는 친구였던 이장님과 상의해서 나를 한 살 빨리 학교에 보냈다. 이장님의 딸이 나와 동갑이었는데, "먼 길을 같이 다니면 좋지 않겠냐?"라는 의견에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이에게는 묻지도 않고, 그게 최선의 길이라고 결정하는 어른 중심의 생각이었다. 우리는 학교를 같이 다니지도, 친하지도 않았다. 단지 옆집에 살았을 뿐이었다.


큰집에 사시던 할머니는 가끔 우리 집에 와서 "연년생으로 태어난 여동생 때문에 성훈이가 젖을 못 먹어서 저렇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사촌 형제들보다 몸이 부실했고, 감기도 자주 걸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살까지 적다 보니 친구들보다 몸이 약했다. 초등학교부터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하고, 딴짓도 많이 했는데 그런 영향도 조금은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괴롭힘이나 따돌림을 당하지는 않았다. 시골 아이들이라서 대부분이 순수했다. 어쩌면 자격지심인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계 모임 친구들도 내가 77년생인지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학 때는 나이보다는 기수 문화가 강했다. 삼수생인 74년생에겐 형이라고 했지만, 재수생인 75년생까지는 말을 트고 지냈다. 1년 후배들은 대부분 77년생이었다. 같은 나이의 후배들도 선배라는 이유로 나를 깍듯이 대했다. 그중 한 명은 유독 나를 많이 따랐다. 그 후배는 덩치는 곰처럼 크고, 행동은 거북이처럼 느렸다. 나이가 같은 걸 알면서도 살갑게 대했다. 문제는 대학을 졸업하고 생겼다.


3년쯤 지났을 무렵,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말투가 평소와 달랐다. 처음부터 반말이었다. 가끔 섞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그랬다. 말투가 이상하다고 했더니, 후배는 "학교도 졸업했고 나이도 같은데 친구 아니냐?"라고 했다. 머리가 띵했다. 딱히 뭐라고 해야 할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모욕을 느꼈지만, 화를 내지도 못했다. 맞는 말 같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후배의 말에 동조하고 싶지도 않았다. 통화는 짧게 끝났다. 후배의 전화번호를 지웠다. 한 번도 그 애를 친구로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한 번 전화가 왔었다. 내 동기와 같이 있다고 했다. 그때와는 다른 말투였다. 실수가 미안해서인지, 내 동기가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77년생 95학번이 아니었다면 겪지 않았도 됐을 불필요한 일이었다. 사회 생활하면서도 빠른 77년생이기 때문에 호칭과 관계 설정 때문에 애매한 일이 종종 벌어진다.


이번 추석에는 코로나19가 퍼진 이후 처음으로 친구들과 계 모임을 했다. 회포를 풀던 중 나이가 술안주가 됐다. 50살 가까운 나이가 되다 보니, 이제는 75년생 친구가 놀림을 당한다. 이제는 한 살 어린 게 오히려 자랑거리가 됐다. 그렇다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1월에 태어난 아들이 일곱 살 될 무렵이었다. 아내가 지나가는 말 비슷하게 학교에 일찍 보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고민하지도 않고 "내가 해 봐서 아는데, 그러지 마."라고 답했다.


얼마 전, 초등학교 7세 입학 정책이 논란이 됐다. 정부는 '학교에 입학하는 나이를 낮추면 영유아 단계의 교육 격차를 줄일 수 있고, 졸업 시기를 앞당겨 사회에 진출하는 시기도 앞당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라고 했다. 내가 가장 걱정됐던 건, 정책 도입 초기에 여덟 살과 같이 다니게 될 일곱 살 아이들이었다. 약 5년간은 피해를 받는 아이들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책 목적을 달성하려면 차라리 대학을 빨리 졸업하게 만드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아이들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책을 추진하려는 핑계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특히 여덟 살과 함께 학교에 다녀야 할 일곱 살 아이들을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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