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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Oct 09. 2022

첫 친구

첫 친구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유년 시절의 기억에는 한 친구 있다. 같이 놀면서 생긴 얼굴의 흉터는 4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흐릿해졌다. 이제 크게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쉽게 사라지지도 않을 것 같다. 잊을 만하면, 다시 머릿속을 맴도는 그 친구처럼 말이다.


친구는 매미 소리가 절정에 이를 무렵이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마을에 나타났다. 외갓집이 우리 옆집이었다. 어른들에게 인사를 마치면, 곧장 우리 집에 왔다. 친구는 대문 앞을 들어서며 쑥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몇 개월 만에 다시 만나서 생긴 어색함을 날리는 데는 몇 마디 말이면 충분했다. 그 친구는 외할머니보다도 너를 보려고 시골에 왔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이름은 홍승후였다. 이목구비는 또렷했고, 얼굴에는 잡티 하나 없이 뽀얗다. 고급스럽고 부드러운 표준어를 쓰고, 아는 것도 많았다. 그렇다고 잘난 척하지도 않았다.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지도 않았다. 나보다 한 살이 많아서인지 어른스럽기도 했다.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와의 첫 기억은 여섯 살에 있었던 일이다. 그날 우리는 마당에 풀어 놓은 닭을 몰고 다녔다. 텔레비전 실외 안테나에서 떨어진 철 막대가 무기였다. 그가 닭을 향해 던진 막대는 내 눈 밑을 파고들었다. 얼굴에서 피가 났다. 병원에 가서 처음으로 얼굴을 꿰맸다. 어머니는 흉이 오래 갈 거라며 걱정했다. 그렇다고 친구를 나무라지는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 일이 있고 나서 더 친해졌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민화투 치는 법을 알았다. 광은 20점, 홍단, 청단, 초단 20점 이렇게 자세하고 친절하게 알려줬다. 금방 빠져들었다. '로보트 태권 브이'보다 더 재밌었다. 그 아인 화투가 보이지 않으면 달력을 오려서 만들었다. 그와 놀고 있으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그리고는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곤 했다.      

     

다음 해 여름, 그는 나를 집에 초대했다. 그의 이모를 따라 고속버스를 탔다. 안양에 있는 아파트였다. 수도권에 가 본 것도, 아파트에 들어가 본 것도, 친구 집에 초대받아 간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회전 놀이기구가 있는 놀이터는 낯설었고, 5층 아파트 벽까지 공을 차올리는 동네 형도 신기했다. 그날 저녁 그의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우리는 부모님을 따라 밤 기차를 탔다. 친구는 내게 “왜 하필 할아버지가 지금 돌아가시냐?”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철없는 말이지만, 어쩌면 내게 미안해서 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그의 친가와 외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나는 그의 큰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집에 돌아왔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에도 어김없이 방학은 돌아왔다. 내가 며칠 외갓집에 다녀온 사이, 승후는 우리 집에 다녀갔다. 그리고는 다음 주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냥 지나가는 말인줄 알았다. 나하고 한 약속도 아니었다. 나는 며칠 후 시골에서 이사 간 서울 큰집에 갔다. 친구가 남기고 간 다짐은 새카맣게 잊고 방학이 끝날 무렵에서야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는 승후가 또 다녀갔다고 했다. 미안했지만, 사과를 하거나 핑계를 대지 않았다. 그럴 수단도 마땅치 않았다.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 승후가 또 마당에서 나를 부를 것만 같았다.


그 해 이후로 승후는 우리 집을 찾지 않았다. 외갓집도 자주 들르지 않았다. 가끔 내려와도 내 눈길을 피했다. 그 일로 배신감을 느꼈던 것 같다. 대학생이 돼서는 몇 번 인사라도 나눠 보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 성격 탓도 있지만, 흘러간 시간만큼 벌어진 오해의 간극도 채우기 어렵다고 느꼈다.


몇 해 전,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를 읽고 나서부터는 승후가 종종 떠오른다. 쇼코는 방학 기간에 일본에서 교환 학생으로 와 소유의 집에 살면서 친분을 쌓는다. 일본에 돌아가고 나서 둘은 사소한 오해로 사이가 멀어지지만, 다시 우정을 되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서울에서 공무원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디서 근무하는지 찾아봤다. 용기를 내서 전화라도 해 보고 싶었다. 물론 하지 못했다. 그런다고 그때의 감정이 다시 돌아오지도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친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에게 아무 존재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라는 <쇼코의 미소>의 한 구절처럼 그는 내 짝사랑 같은 우정의 대상이는지도 모르겠다. 변하지 않고,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사실도 있다. 그는 내 인생 첫 친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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